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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연쇄살인마, 사도세자

by 지식노트 202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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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이선(1735~1762)은 ‘당쟁의 희생양’으로 주로 인식돼 왔습니다. 엄한 아버지 영조의 꾸지름에 의해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죠

과연 사도세자는 억울한 죽음의 희생양일까요? 그는 사실 조선의 가장 잔혹한 연쇄살인마였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가 죽인 중관, 나인, 노속이 100여명에 이른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세자는 체격이 크고, 뚱뚱했습니다 

 
영조 20년 (1744년) 4월 14일 말합니다 “세자가 식사량이 너무 많고 식탐을 억제하지 못해 뚱뚱함이 심해지고 배가 나와 열 살 아이 같지 않다” “(세자가)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뛰어 나지만 뚱뚱해서 얼굴 생김새가 별로라 답답하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도 말년에 쓴 회고록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체격이 크고 굵다”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기골이 장대하여 무예를 좋아하고, 병서를 가까이 했습니다

정조실록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도)세자가 어릴 때부터 군대놀이를 좋아했고 병서도 즐겨 읽었다, 한가할 때면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했으며 15~16세부터는 건장한 군사들도 들기 힘들어하는 청룡도와 커다란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역사학자들은 사도세자 나이 15세에 대리청정 이후 그의 병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사도세자는 내관 김한채를 죽여 그의 머리를 들고 후궁들에게 보여줬다"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 빙애를 죽였다"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후궁을 죽였다" "칼을 바치러간 장인을 죽였다"

끝내는 칼을 들고 아버지인 영조를 죽이겠다고 난동을 피운 사례도 있으니. 결국 친모와 장인마저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처분(사형)' 해야 한다고 읍소합니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지만, 이를 듣지 않자 뒤주에 가두어 버립니다. 사도세자는 8일을 굶은 뒤 죽었습니다

우리 기억 속의 사도세자와는 사뭇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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