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당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을 불후의 군주로 남게 한 참모, 위징

by 지식노트 2021. 11. 14.
반응형

당(唐) 태종(太宗)과 위징(魏徵)의 관계는 인재를 어떻게 구하여 쓰고, 그리고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일천삼  년을 훌쩍 뛰어 넘는 시대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큰 가르침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당 태종의 최측근이라고 할수 있는 방현령은 51번 언급되는 반면에, 위징은 무려 101번 나와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에서 차지하는 위징의 비중을 가름하게 합니다. 

위징은 본래 당 고조(高祖)의 태자인 이건성의 책사로 이세민을 죽일 것을 간했다고 합니다. 당의 건국에 이세민의 공이 가장 컸음에도 불구하고 적장자 후계 명분에 밀려 맏아들 이건성이 태자로 책봉되자, 이세민의 불만으로 인해 왕자들 간의 권력 투쟁이 심각해집니다. 
결국 이세민은 황제의 이름을 빌려 형제들을 궁에 들게 하고 현무문(玄武門)에서 매복하고 있다가태자인 형과 아우를 주살하는 이른바 ‘현무문의 난’을 전기로 하여 권력을 잡고 태종에 오르게 됩니다. 

<이야기 1>
이세민은 위징에게 “그대가 세자에게 나를 죽이라고 했다니 형제들을 이간질한 그 죄가 크다”고 질책하자, 위징은 “세자가 저의 간언을 들었으면 오늘 같은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고 당당하게 답하였다고 합니다. 당 태종으로 등극한 이세민은 위징의 인격과 당당함을 높이 사 목숨을 구하는 것은 물론 간의대부(현 감사원장과 유사)라는 직책을 맡겼습니다.
<이야기 2>
위징은 황제가 듣기 불편해 하는 까칠한 소리를 많이 한 것으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하루는 태종이 조회를 하다말고 박차고 나와 내전에 들어서 화를 참지 못하여 칼을 뺐다 꼽았다하며 으르렁 거렸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장손 황후는 황제에게 큰 절을 하고, 황제가 바른 말을 하는 충신을 얻었으니, 황제가 성군이 될 것임을 경하 드린다고 했다고 합니다.
기분이 좋아진 황제는 조회로 돌아가 위징의 의견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이야기 3>
위징:“폐하가 신을 양신(良臣)으로 만들고자 하시면, 충신(忠臣)이 되지 않도록 하옵소서”.   당 태종: “양신과 충신의 차이가 무엇인가?”  위징: “양신은 스스로 근사한 이름을 얻고, 군왕에게는 숭고한 칭호를 누리게 합니다... 반면에 충신은 자신의 몸은 주살되고, 군왕은 큰 악명을 뒤집어 쓰게 합니다. 집안과 나라가 모두 큰 훼손을 입지만 오직 홀로 충신의 명예를 누리게 됩니다”
<이야기 4>  
태종: “명군(明君)과 암군(暗君)은 어떻게 다른가?” 위징: “군주가 밝은 것은 두루 듣기 때문이며, 군주가 우매한 까닭은 한쪽 말만 믿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다양한 경로로 이야기를 들어 소통을 잘하면 실정을 잘 아는 군주가 되고,  측근(inner circle)들의 이야기만 들으면 실정을 모르는 답답한 군주가 된다는 뜻으로 예나 지금이나 측근들에게 너무 의지하면 군왕의 눈과 귀는
가려지고 어두워져 백성들과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이야기 5>
당 태종: “근자에 조정대신들이 국사를 제대로 논의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위징: “폐하가 마음을 비우고 허심탄회하게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이면 응당 말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똑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사람에 따라 그 이유가 다릅니다.
나약한 자는 속마음이 충직해도 말을 하지 못하고, 군왕의 신임을 얻지 못한 자는 신임을 받지 못할 가 두려워 감히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녹봉을 생각하는 자는 자신에게 불이익이 있을까 염려하여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서로 침묵하며 남의 말에 고객만 끄덕이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대화는 정관 15년(641년)에 있었던 일로 무려 1373년 전의 일이나 지금 국무회의의 모습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야기 6>
위징이 병이 들어 죽자,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한 것으로 남아 있습니다.  “무릇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관을 단정히 할 수 있고, 옛일로 거울을 삼으면 흥망을 알 수 있으며, 사람으로 거울을 삼으면 득실을 밝힐 수 있다.

짐은 일찍이 이 세 가지를 가져 내 허물을 막을 수 있었다. 지금 위징이 세상을 떠나니, 거울 하나를 잃어 버렸도다.” 
당 태종도 양신 위징이 죽고 난 후 고구려 원정과 후계자 선정에 실패함으로써 큰 오점(汚點)을 남기게 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