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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대역죄인에게 내린 '기록말살형',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by 지식노트 2023.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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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처참(陵遲處斬)이나 부관참시(剖棺斬屍)라고 하면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대역죄인에게나 내리던 가장 가혹한 형벌입니다. 로마제국에도 이와 비슷한 수준의 극형인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흔히 '기록말살형'으로 번역되는 이 형벌은 '공공의 적'으로 지목된 황제, 장군, 정치인 등 권력자의 모든 기록을 없애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 형벌이 내려진 죄인에 관련한 모든 조상(彫像)과 초상이 파괴되고 공식 문서와 비문, 통화에서 그의 이름이 삭제됩니다.

기록뿐 아니라 그를 기억할 만한 기념물까지도 모두 없애는 것이기 때문에 명예를 중요시하던 고대 로마에서는 사형보다 더 중한 형벌로 취급되었습니다.

칼리귤라·네로·도미티아누스·코모두스 등 특별히 악독한 황제들에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는 사후 적용되었습니다. 황제의 얼굴 조각을 다음 황제의 모습으로 재조각하는 관습은 자원을 재활용하는 로마인들의 실용성도 나타내지만, 전 황제를 지웠다는 의도적인 메시지를 확실하게 보내기 위해서였기도 합니다.

 

기록말살형을 내리기 위해서는 로마 사회의 최고의결기관에 해당했던 원로원의 의결이 필요하였습니다. 형식적이긴 하였지만, 로마 제국의 황제도 원로원에 의해 정식으로 인정받아야 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기록말살형이 얼마나 가혹한 형벌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기록말살형


로마의 콜로세움도 담나티오 메모리아이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래 자리 잡았던 네로 황제의 200㏊ 크기 쾌락궁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경기장을 지은 것입니다. 네로의 금빛 거상(Colossus)은 태양신(Sol)으로 변경되어 철거를 겨우 모면합니다.

이렇게 기록말살형이 실제로 시행된 경우에도, 로마의 역사에서 완벽하게 지워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는데, 그것은 시대적·사회적 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먼저 기록말살형을 집행하는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고, 형의 집행 대상자가 사회 고위층이었던 만큼, 그의 이름이 기록된 문서도 자연스럽게 많을 수 밖에 없었고, 비문이나 흉상, 벽화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너무 광대한 것도 형 집행이 힘든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당시에는 이동수단이나 통신수단이 많이 발전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인 로마에서는 어느 정도 형이 잘 집행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모든 로마의 영향권 내에 있는 속주나, 도시들에서도 같은 수준으로 집행되기를 기대하기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실제로 폭군 황제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를 죽이고 기록말살형을 집행하기 위해 몇년 동안이나 제국 전체를 샅샅히 훑었지만, 게타가 새겨진 주화를 모두 찾아서 처리하는 것에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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