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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박태보(朴泰輔), 의연한 선비정신을 보여준 조선의 선비

by 지식노트 202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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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15년인 1689년 음력 5월5일 아침 노량진 사육신 묘지 옆에서 조선의 기개 박태보(朴泰輔·1654~89)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열흘 전 오두인(吳斗寅) 등 86명이 숙종에게 상소를 올렸습니다.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29살의 젊은 왕은 아들(뒷날의 경종)을 낳아준 장희빈에게 빠져 정비(正妃)인 인현왕후를 내쫓고자 했고,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 상소는 오두인 등의 상소가 처음이었습니다. 숙종은 분노하여, 한밤중 (삼경,三更·오후 11시~오전 1시)에 친국(親鞫)을 하겠노라 천명했다. 오두인 등이 모두 끌려왔습니다.

숙종이 물었습니다 "누가 상소문을 썼느냐?" 오두인 등이 대답했습니다 "박태보입니다." 박태보가 끌려왔습니다다. 숙종의 진노를 박태보는 태연히 그리고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숙종은 장을 치라 명했고 박태보는 의연했습니다. 숙종은 말했다 "매우 쳐라, 장을 매우 쳐라" 그 후 모진 고문이 시작되었습니다. 피의자 무릎을 바위로 짓이기는 압슬형(壓膝刑)이 이어졌습니다. 박태보의 무릎과 허벅지 뼈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인두로 발바닥을 지지는 낙형(烙刑)도 행해졌습니다.

달군 쇠를 교대로 지져대니 벌건 기름이 끓어 넘쳤고 누린내가 코를 찔렀다고 합니다. 인간이 고통을 가장 크게 느끼는 고문들이 계속 행해졌으나 박태보는 여전희 의연했습니다. 뼈가 부스러지고 살이 타는데도 얼굴빛을 편안히 하고 아프다는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낙형과 압슬형은 모두 열세 번 짓이기고 지지는 걸 1회로 치니, 박태보는 모두 스물여섯 차례 몸이 지저지고 무릎이 짓이겨졌습니다. 장을 더 맞으니, 정강이뼈가 튀어나왔고 사람들이 무릎을 싸맬 천을 찾자 박태보가 "내 도포 소매를 찢어서 쓰시오"라 말하고는, 소매 속 부채를 옆사람에게 꺼내주며 "움직이는 데 꽤 방해가 되니 집에 전해주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록 사관은 '임금의 노여움이 격발될수록 응대가 화평스러웠고 정신의 의연하며 절의가 있었다' 라고 고했습니다. 임금은 박태보를 진도로 귀양보냈습니다. 귀양 가는길에 박태보는 노량진을 넘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하필 죽은 곳이 사육신 묘 앞이였습니다. 

박태보의 아버지 박세당은 아들의 마지막을 바라보며 “조용히 죽어라”고 하였고 아들은 “조용히 가겠습니다”고 답했습니다. 뜻있는 선비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고 장사치들은 관에 사용할 목재값을 받지 않았습니다. 선비들은 밤마다 「출사표」, 「정재절사록」을 각각 한 편씩 읽고서, 한 평생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연을 즐겼다고 합니다.

* 「출사표(出師表)」는 제갈량이 위나라 토벌을 출정하는 날 유비의 아들인 유선 황제에게 바친 글로, 신하로서 군주에게 올리는 충신의 글. 「정재절사록(定齋節死錄)」은 박태보에 대한 기록

박세당은 아들의 비석에 “차라리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며 합치되는 바가 없이 살다 죽을지언정,  맹자가 이른 대로 ‘이 세상에 맞춰 살면서 남들이 선하다고 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자에게 고개 숙이고 마음을 낮추지 않겠노라”고 적었습니다.

참으로 지독합니다. 지금은 이런 의인이 존재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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