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베이징의 인사동, 유리창(琉璃廠) 문화거리

by 지식노트 2023. 2. 2.
반응형

서울에서, 대한민국에서 古서적과 골동품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할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울 인사동을 떠올릴 것입니다.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구한 중국의 역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골동품과, 국보급 보물들을 낳았습니다. 중국에서 이러한 물품들을 찾으려면 베이징의 유리창 거리로 가야 합니다.

베이징 유리창 거리

천안문 광장 남서쪽에 위치한 유리창은 서울의 인사동과 비슷한 곳으로 고서적, 골동품, 서화작품, 문방사우 상가들이 모여 있는 문화예술의 거리입니다.

‘유리창’이란 지명은 13세기 원나라 때 유리 기와를 굽던 황실 가마를 설치한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한족들의 도자기에 큰 애착을 가졌던 몽골인들은 베이징 외곽에 도자기, 기와 공장을 세웠습니다.

유리창 거리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탄생한 명나라 가정(嘉靖) 32년(1554년)에 베이징 외성(外城)이 건설되면서 유리창은 성안에 들어오게 됐고 더이상 외진곳에 있는 작은 마을이 아닌 베이징성 내 하나의 부분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7세기 청나라 때로 들어오면 가마는 폐쇄되고 그 대신 서점가가 형성되었으나 예전의 이름은 그대로 남아서 현재도 유리창 문화거리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유리창이 본격적으로 문화의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하게 된 것은 청나라 때부터입니다. 청나라
관부는 "만한분성거주(滿漢分城居住)" 즉 만족과 한족이 분리되어 거주하는 정책을 내놓으면서 만족은 자연히 베이징성 중심부에 자리잡았고 한족은 베이징 외성에 거주하게 됩니다.

유리창 거리를 거니는 관광객들

당시 유리창은 베이징 외성 서부에 위치했고 많은 한족 관원들이 이곳에 집거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전국 각지의 회관)숙소)이 대부분 이곳에 모여있어 상경한 외지인들이 많았습니다.

해마다 과거시험이 열리면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수험생들이 회관이 많은 유리창 거리에 몰려들었고, 수험생들의 집결은 자연스럽게 문방사보 시장이 유리창 거리에서 펼쳐지게 하였습니다. 과거 시험을 치러온 수험생들이 문방사보뿐 아니라 도서를 찾는 것은 인지 상정, 북경의 큰 도서 시장이 모두 유리창 거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유리창 거리의 문방사우

이렇게 유리창 거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면서 각지의 도서 상인들이 이곳에서 책을 팔고 가게를 차리며 서점을 경영했고, 당시 이 거리에 있는 다양한 책방들에서는 각종 서적과 과거시험 필수품을 팔았습니다.

지식인이 모인는 곳이면 자연히 지식의 교류가 있기 마련입니다. 조선의 사절단으로 북경을 방문한 선비들도 자연스레 유리창에서 중국의 학자들과 지혜를 나누곤 했습니다. 홍대용, 이덕무, 박제가, 열하일기의 연함 박지원 등 북학을 숭상하던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유리창은 지식 교류의 거점이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