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과 삼각산이 한눈에 보이는 영산이자 명산인 이 산은 소나무를 많이 볼 수 있어 목멱산(木覓山)이라 불렀습니다.
목멱산은 600년전 한양을 설계하며 삼각산과 한강 사이에 위치한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전국의 봉수는 목멱산 봉수대에 집결되었고, 목멱대왕이라 봉하며 호국의 신 목멱산신을 모신 국사당(國師堂)이 목멱산 정상에 있어 왕들은 국사당에 거동했습니다. 사직단과 마찬가지로 기우제, 기청제, 기곡제를 이곳에서 지냈습니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의 기운을 누르고자 목멱산을 빼앗습니다. 조선총독부 건설 전, 총독부 건물을 세워 운영하였고 민족의 영산인 목멱산 자락에 조선신궁을 지어 신궁화 하였습니다. 일본은 국사당이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여겨, 이전을 강요하여 국사당은 인왕산 선바위 옆으로 옮겨졌습니다.
일제는 역사 속 목멱산을 남쪽의 산인 보통명사 남산(南山)으로 격하하고, 순환도로에 벚나무 600그루를 심어 남산순환도로로 불렀습니다.
광복 후 목멱산은 민족의 영웅들이 자리했습니다. 숭례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백범광장이 나오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시영 선생 상이 나타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6형제의 모든 재산과 목숨을 바친 전설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그 옆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오른팔을 펼치며 한강과 효창원을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조선신궁이 있던 참배길에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이 세워졌고, 기념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전에 쓴 유묵(遺墨)이 새겨진 돌이 빛납니다. 광장에는 장부가가 울려 퍼집니다.
민족의 영웅들은 제자리를 찾았으나, 목멱산을 이름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목멱산은 여전히 보통명사인 남산으로 불립니다.
남산은 목멱산으로, 남산공원은 한양공원으로, 남산타워는 목멱산 타워로, 남산순환도로는 목멱산 순환도로로 불리워야 합니다. 이름에는 역사가 묻어 있습니다.
목멱산 위에 저 소나무가 철갑을 두를 때까지, 남산이 이름을 되찾는 그날을 기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