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형벌, 유배형에 대해서 여러 역사 드라마와 책을 통해서 접해보셨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도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지은 자를 먼 변방이나 오지로 보내는 형벌이 존재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옥사는 있었지만, 요즘으로 따지자면 수사와 재판 과정 중인 미결수를 가두어 놓는 임시 구치소만 존재했을뿐, 장기간에 걸쳐 죄수를 수용하는 교도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조선시대의 형벌, 오형제도
조선시대의 형벌은 대명률에 근거하여 집행되었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은 조선이 황제의 나라로 섬겼던 명나라의 형법을 말하는 것이고, 대명률에 기반하여 조선시대에도 다섯 가지 유형의 형벌인 오형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오형제는 엉덩이를 가벼운 매로 때리는 태형, 무겁고 묵직한 곤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장형, 장형을 맞고 강제노역을 몇 년간 해야하는 도형, 귀양(유배)를 보내는 유형, 그리고 사람의 목숨을 끊는 사형이 있었습니다.
이중에서도 유형은 사형 다음으로 중한 형벌이었습니다. 외딴 시골에 가서 살게하는 것이 왜 그렇게 가혹한 형벌일까요? 요즘 세상에는 일부러 시골에서 한달살기 등도 하는데 말이죠?
□ 유배형은 왜 가혹한 형벌일까?
1. 조선시대 유배형이 가혹한 이유는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공동체로부터의 축출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와 가문, 집안, 대대로 살아온 고향 등 조선은 완벽히, 철저한 공동체 사회였습니다. 공동체를 통해 보증받았던 자기 존재 지위와 가치를 일순간에 박탈당하는 것이어서, 유배형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형이었습니다.
2. 또한 유배형은 기약이 없는 징역형이었습니다. 유(流)’는 ‘유수행야(流水行也)', 물이 한 번 흘러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듯, 중한 죄를 범한 자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 영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라는 뜻입니다. 특히 모반 등으로 인해 귀양을 간 사람은 귀양을 보낸 다음 사약을 내려 거기서 죽게 하는 등 가혹한 처분을 받았습니다.
3. 유배형을 가는 길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흔히 사극에서 본 소가 끄는 달구지를 타고 유배를 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양반들은 말을 타고 갔고, 평민들은 걸어가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평민들은 장형을 수십대 맞고 수십일에 걸친 먼 귀양길을 걸어가다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죄인은 유배지까지 가는 경비와 숙식비를 모두 부담해야 했고, 죄인의 호송을 담당하는 호송인 비용도 제공해야 했습니다. 만약 집안에 돈이 부족하여 호송인에게 올바른 처우를 해주지 않으면, 가는 길을 더욱 힘들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도 허다했습니다.
물론 권세가 있는 집안의 양반이나, 고관대작이 잠깐 유배를 가는 경우에는 달랐습니다. 가는 길에 지방의 절도사와 사또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기도 하고, 유배지로 향하는 길에 선영이나 명소에 들르는 등 일종의 황제유배를 가기도 하였습니다.
경종 2년(1722)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갑산(甲山) 유배 길에 오른 윤양래(尹陽來)의 경우 전체 18일 여행 동안 가는 곳마다 고을 수령으로부터 성대한 접대와 선물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선물을 받았던지 수령이 챙겨준 물건을 싣고 가던 말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퍼지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심지어 윤양래의 호송관인 의금부 도사는 같이 동행하지 않고 별도로 출발했으며, 중간에 험준한 고갯길에서는 자신이 타고 가던 가마를 제공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유배형의 종류
『고려사』 형법지 제 5형조엔 유배형을 경중에 따라 이천리, 이천오백리, 삼천리로 구분했습니다.
① 2000리 유배 +장형(곤장) 17대+ 도형(징역) 1년+ 속전(벌금) 동80근
② 2500리 유배+ 곤장 18대 +징역1년+벌금 동 90근
③ 3000리 유배+ 곤장 20대+징역 1년+ 벌금 동 1백근
조선 시대 들어와 유배형은 더욱 가혹한 형벌이 되었습니다. 유배형에 징역을 없애고 벌금을 낮추는 대신, 장형을 대폭 강화한 <대명률(大明律)>을 수용했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곤장 100대를 때린 후 ’2000리 유배+ 벌금 동 30근, 2500리 유배+벌금 동 33근, 3000리 유배+벌금 동36근 부과한 <대명률>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600리, 750리, 900리로 조정하였습니다.
<조선 시대 유배형>
① 곤장 100대+ 오승포 360필+600리 유배(강화 영월 울진 등)
② 곤장 100대+오승포 330필 + 750리 유배(강진 동래 남해 등)
③ 곤장 100대+ 오승포 300필 +900리 유배(삼수 갑산,흑산,제주 등)
유배지 가운데 가장 혹독한 지역은 삼수, 갑산과 같은 함경도 변방이나 흑산도, 추자도, 제주도 등 호남 지역의 외딴 섬들이 이었습니다. 한양과의 거리도 멀었지만, 워낙 변두리 시골이다 보니 현지인들이 살기에도 기후나 물자 등 생활 여건이 열악하였습니다. 또한 귀양을 가면 보통 그 마을의 사람들에게 식량 등을 얻어야 했기에, 마을 사람들에게도 핍박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 유배지의 생활
유배인이 유배지에 도착하면 해당 고을의 수령은 유배인이 머무를 거소와, 유배인을 감시할 관리인을 지정했고 정기적으로 유배인의 동향을 파악했습니다. 유배의 종류는 고향에서 지내는 본향안치, 섬에서 지내는 절도안치, 변방에 지내는 극변안치,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둘러싼 집 안에서만 지내는 위리안치(圍籬安置) 등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그 중 반역 등 중죄에 연루된 관료나 왕족 출신들에게는 가장 가혹한 위리안치라는 형벌이 내려졌습니다. 위리안치는 유배인이 거주하는 집을 가시 많은 탱자나무로 둘러싸게 하고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외부인 출입도 금지하는 형벌입니다. 다른 귀양살이에서는 손님을 맞거나 마을을 돌아다니는데 제약이 없었던 것에 비하면 죽을 때까지 남과 교류하지 못하고 혼자 살아야 합니다.
또한 외문을 항상 잠그어 외인의 출입을 삼가게 하고, 열흘에 한 번 양식을 주어 그 양식으로 연명하게 합니다. 또한 집안에 우물을 파서 그 우물에서 나오는 물로만 생활하게 하였고, 유배인에게 물품이나 양식을 주면 불충에 준하는 죄를 내리게 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독방에 가둬서 평생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똑같은 형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