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외국인들을 위한 가게, 시설이 많아 외국인들의 성지라 불리우던 이태원, 얼마 전에는 많은 청년들이 죽은 참사가 일어난 이태원의 이름에는 우리 민족의 가슴아픈 역사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태원의 한자는 배나무 리(梨)’를 써서 ‘이태원(梨泰院)'이라고 불립니다.
이태원은 표기하는 한자가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조선 초에는 ‘오얏나무 이(李)’를 써서 ‘이태원(李泰院)’이라 했다가,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이태원(異胎圓)’으로 바뀌었고, 이후 효종때부터 다시 ‘배나무 리(梨)’를 써서 지금의 ‘이태원(梨泰院)’이라 고쳐서 불리우고 있습니다.
이태원의 지명은 왜 세 번이나 바뀌었을까요?
이태원의 지명은 임진왜란 후 '씨가 다른(異) 아이를 임신했다(胎)'는 뜻의 異胎院으로 썼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적혀있습니다.
왜군의 선봉장이자 임진왜란을 다룬 여러 콘텐츠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가토 기요마사, 청정의(加藤淸正) 군대가 숭례문(남대문)으로 입성한 뒤 인근 이태원에 주둔한 것이 오명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그 사연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이태원(李泰院)’이 다른 민족의 태를 가진 곳이란 뜻을 지닌 ‘이태원(異胎圓)’으로 바뀐 사연은 굉장히 애달픕니다.
"청송이 빽빽히 들어선 황학곡(荒壑谷, 남산 기슭에 있던 골짜기)에 그닥 크지도 않은 기와집 한 채가 의구히 서 있음을 바라볼 때, 청정(淸正, 가토 기요마사)은 걸음을 재촉하여 가까이 가서 현판을 보게 되었으니 운종사(雲鍾寺)란 글씨가 굵직하게 씌어 있다. 의기양양하게 뜰 아래 깔려있는 섬돌을 밟고 대문으로 들어서니 유두분면한 일색 미인의 부녀들이 법당 앞에서 보고 가는지라. 지리도 모르고 금수강산을 칼질하여 오는 청정의 가슴은 설레었다.
전운 속에서 있는 신경을 다해 가며 번개와 같이 휘두르던 칼을 집어던지고 가슴 속에 타오르는 객고 정열을 억제치 못하여 부하를 시켜 운종사의 주지를 잡아오라는 서슬이 푸른 명령을 내렸다. 그는 운종사의 주지를 무지하게도 결박을 지어 놓고 그 일색 미녀들을 탈취하게 되었다. 청정이 사창에 누워 원앙꿈을 이룰 때 때를 따라 요란스럽게 치는 종소리는 너무도 안면(安眠)하기에는 괴로우므로 부하를 시켜 깨뜨리라 명하였다.
운종사에 아침과 저녁으로 흘러나오던 종소리는 끊어졌다. 그때 종이 매달렸던 대들보에선 좀 같은 벌레가 나와서 처음에는 나무 끝을 잡더니 차차 번성하여 사람에게로 덤비게 되었다.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잠을 이룰 때 소리 없이 나무틈 밖으로 나와서 살을 뜯으니 이것이 ‘빈대’였다.
운종사의 주지는 절간에 종이 없음을 쓸쓸하게 생각하여 깨뜨려버린 쇳조각을 모아 붙이고 다시금 치게 되었으니 이상하게도 빈대들은 종소리를 신호하여 꼭꼭 청정에게만 덤볐다 한다. 그 후 빈대들은 청정의 진영 내로 출몰하여 부하들을 뜯게 되니 안면을 이루지 못한 부하들은 이로부터 고생하였다 한다.
...운종사에서 일을 보던 미녀들은 오고 갈 데가 없어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융경산(隆景山) 밑에다 토막을 짓고 청정과 관계가 있은 결과로 임신하였던 태아를 낳게 되니 아비가 타국인임을 생각할 때 그는 반드시 이태(異胎)라 하여 이웃 사람들은 벌써 알고 수군거리길, 이태(異胎)가 있는 집이라고 해서 이태원(異胎院)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32.7.17.
가토 기요마사와 그의 수하들이 이태원에 있던 절 운종사에 왔던 부녀자들을 강제로 겁탈하여 그들의 아이를 가지게 된 부녀자들이, 집에서 쫓겨나 모여살자 '외국 사람의 아이를 밴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 이라는 지명이 붙은 것이 이태원의 두 번째 이름
이태원(異胎院)의 유래입니다.
이태원의 명칭이 오늘날 '배나무 이태원'이 된 것은 가토의 왜군이 물러난 지 반세기가 흐른 효종 때입니다. 북벌을 준비하던 효종은 이태원 지역에 배나무가 많다는 것을 듣고, 지명을 현재의 이태원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뒤로도 이태원과 외세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졌습니다. 1882년 임오년에 조선 구식 군대가 군란을 일으키자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된 청나라 부대가 이태원에 주둔했고, 청나라를 꺾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이 이곳에 조선군사령부를 세웠습니다.
이태원과 용산 일대에 꾸준히 주둔하던 외국 군대로 인해 자연스럽게 근처의 상권이 발달하면서 이태원은 지금까지도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서울의 상권이 되었습니다. 역사가 참 얄궂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