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이들은 세상에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왜 정말로 위대한 왕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종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고, 실천가였습니다. 세종은 백성, 신하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려고 했고 실제로 수 많은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이를 실천했습니다.
첫째, 세종은 백성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는 낮은 직급의 관리인 수령을 자주 만났습니다. 재위 기간 세종이 수령을 친견(독대)한 횟수는 무려 392회나 됐다(월 1.03회). 조선 왕조에서 왕이 지방 수령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세종 때부터였고 그 이후에도 친견을 이렇게 주기적으로 많이 실시한 군주는 없었습니다. 세종은 수령의 임무는 본인이 직접 백성의 일을 살필 수 없으므로 수령들이 존재하는 것이니 부디 백성을 사랑하는 일을 행하도록 하여라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둘째, 세종은 실무 정책 담당자들 돌아가며 만나는 윤대(輪對)라는 제도를 도입해 국사를 보고받고 세세한 내용까지 파악했습니다. 재위 초반인 1425년(세종 7년) 6월 23일 예문관 대제학 변계량은 왕의 눈과 귀를 가리지 않고 직접 관리들을 만나는 윤대 제도를 제안했고 세종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약 4개월 뒤인 1425년 10월 6일 윤대를 시작해서 1437년(재위 19년)까지 거의 12년 동안 윤대를 거행합니다.
윤대의 또다른 특징은 각 관서의 낭관(郎官 : 사무관급)들을 차례로 면담하고 업무에 대해 질의하는 자리였다는 것입니다. 실무를 담당하는 담당자들은 일의 디테일과 현실적인 어려움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세종은 나랏일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적폐(積弊 : 누적된 폐단)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국무총리 정도의 위치에 있는 지도자가 중앙부처 5급 사무관, 4급 서기관 정도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자리인데 이걸 12년 동안 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셋째, 신하들의 구중궁궐을 벗어나기 위해 세종이 가장 중시한 점은 어전회의의 활성화였습니다. 그는 경연이라는 세미나식 어전회의를 매주 한 번 이상 개최했습니다. 왕 앞에서 머리를 숙이거나 땅에 엎드리지 말고[無俛伏·무면복] 곧은 자세로 말하게 하여 자유로운 토론을 유도했습니다.
세종은 신하들에게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꺼내달라고 당부하면서 어떤 의견이라도 경청했습니다. 긴급 사안이 발생하면 관계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게 하되, 일의 잘된 것과 잘못된 것을 모두 말하게 하였습니다. 세종은 자신을 비판하고 의견에 반대하는 신하라도 “그 뜻이 좋다” 혹은 “그 뜻이 아름답다”면서 그들의 말을 인정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더불어 세종은 신하들과의 어전회의에서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화를 내는 일이 없었습니다.
세종은 정말 끊임없이 소통하는 군주였습니다. 세종의 하루 일과를 보면 일반 사람은 시켜줘도 하지 못할 고강도의 업무들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세종은 매일 오전 윤대(輪對)를 실시해서 각 부처 실무자들을 면담하고 업무에 대해 물었습니다. 오후에는 지방관들을 면담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시장, 군수, 구청장 정도가 되겠습니다. 각 지방자치단체의 관리자들을 만나 나라 곳곳의 사정을 살피고 어루만졌습니다.
북방영토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지방관 면담에서 영감을 얻어 야인정벌과 사민(徙民 : 백성을 이주시킴)정책 등을 구상했습니다. 이를 밑거름 삼아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4군 6진을 개척하고 현재 우리나라 국토를 완성한 것입니다. 임금의 일과는 한밤중에도 계속되었습니. 상소를 검토하고 긴급한 건은 재상들이나 집현전 관원들을 불러들여 야간 어전회의인 야대(夜對 : 야간 면담)를 진행했습니다.
정말 하루 종일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린 것입니다. 실로 본받을 왕의 하루입니다. 소통을 통해서 태평성대를 이루어내고 수 많은 업적을 남긴 불후의 군주 세종, 그가 남긴 유산은 까마득한 후손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