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고종황제가 대한민국 황제로 즉위하며 근대국가가 시작될 때, 활명수가 우리나라 제품 브랜드의 역사를 최초로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대한제국 궁중 선전관으로 있던 민병호가 궁중의 생약 비법에 서양 의학 기술을 접목해 만든 소화제 활명수는 세계 최초희 합성의약품으로 알려진 '아스피린'과 동갑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년전 소화불량은 생각보다 크고, 자주 겪는 병이었고 급체나 토사곽란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당시에는 꽤나 중한 병으로 치부되던 시절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빨리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에 비위생적인 조리 환경 등이 더해져서 많은 사람들이 소화불량에 시달렸습니다. 당시 치료제라고 해봐야 뜸이나 침 혹은 시간을 들여 달여야하는 탕약밖에 없었으니 빠른 치료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활명수는 간편하게 마실 수 있으면서 효과까지 좋았으니 일반 서민들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치료제였습니다. 이름 그대로 목숨을 살리는 물(活命水)였으니, 누구나 조금만 체했다 싶으면 활명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상품의 본질을 정말 잘 반영한 브랜드입니다.
활명수는 위속 음식물을 직접 삭이는 방식이 아니라 신경을 자극해 위장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원리였으니 몸에도 무리가 없는 방식입니다. 이를 위해 계피, 정향, 후박 등 이름도 생소한 한약재를 달인 뒤 그 약물을 체로 걸러내어 다시 약재를 첨가하고 마지막으로 박하, 클로로포름 등을 첨가해 효과를 극대화시킵니다. 이 마지막 과정이 활명수의 특급 비법인데 그 배합비율을 제조책임자만 아는 철저한 비밀이라고 합니다.
민병호는 큰아들 민강과 함께 1897년 동화약방을 설립해 본격적으로 활명수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로써 동화약방은 국내 최초의 제약기업이자 최장수 제조기업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게 됩니다.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 특허궁에 활명수와 부채료를 상표로 등록합니다. 두 상표는 현재까지도 우리나라 최고령 등록상표로서 신기록을 매일 갱신해가고 있습니다.
활명수는 답답한 속을 확 뚫고, 체한 것을 내려가게 하는 소화제로 인기를 끌었지만 한병에 50전이나 하는 가격이 당시에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시세로 설렁탕 두 그릇, 막걸리 한 말 정도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일반 가정에서도 한병을 사서 조금씩 아껴서 먹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기 제품이 나오면 유사품이 으레 만들어집니다. 활명수 역시 '보명수, 회생수, 통명수'등 유사한 이름의 경쟁 제품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동화약방은 1931년 주식회사동화약방으로 이름과 조직을 개편하며 근대기업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지만 초대 사장이던 민강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크게 휘청이게 됩니다. 옥고를 견디지 못하던 민강 사장이 1931년 48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동화약품 본사는 일제강점기 시절 상하이에 설치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 조직을 연결하는 연통부 역할을 했습니다. 임시정부의 활동 내용을 국내에 전달하고, 독립운동 자금과 정보 동향을 취합해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활명수와 동화약방 그리고 민강 사장은 말 그대로 사업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민강은 1909년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이끈 것을 시작으로 조선약학교, 소의학교 등을 세우고 3.1운동 이후에는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앞장서며 독립을 위해 피튀기게 헌신했습니다.
독립을 위한 그의 열망은 동화약방과 부채표라는 브랜드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동화는 주역에서 나오는 二人同心 其利斷金 (이인동심 기리단금) 時和年豊 國泰民安 (시화연풍 국태민안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그 예리함이 쇠(金)도 자를 수 있으며, 나라가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들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이 평안해진다”라는 의미로 온 국민이 합심해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았습니다. 활명수의 상징 부채표 모양 역시 시전의 紙竹相合 生氣淸風 (지죽상합 생기청풍)에서 가져와 "종이와 대나무가 서로 합하여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의미의 민족정신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동화약방의 초대 사장이자, 위대한 독립운동가 민강 사장이 사망하면서 동화약방은 새 주인이 필요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민병호는 이미 70대 노인이였고, 아들은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민씨 문중은 민족기업가 윤창식에 동화약방을 부탁합니다. 윤창식은 성공한 사업가였고, 빈민구제사업과 독립운동자금 지원 등 민중에게 두루 존경을 받는 민족기업가였습니다. 윤창식이 사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동화약방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승전보를 알리는 신문 광고를 일간지에 내겁니다. 또한 건강한 위장과 체력이 근원이며 "건강한 조선을 목표로 하자"라는 광고를 내거는 등 민족의 아픔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활동을 꾸준히 지속합니다. 윤창식을 이어 동화약품 사장을 지낸 큰아들 윤광열도 상하이 임시정부로 건너가 광복군 중대장으로 활동한 독립군 출신입니다. 활명수를 만든 동화약방은 세명의 독립투사를 배출해낸 명실상부한 독립운동 기업입니다.
독립운동과 사업에 매진하던 동화약방은 오히려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위기를 맞이합니다. 일제강점기 이북과 만주지역의 매출이 남한 매출을 뛰어넘어 만주에 직접 공장을 설립하여 운영하던 중 일본이 패망하며 만주지역의 생산시설을 모두 포기해야 했습니다. 또한 미국과 소련이 남한과 북한을 각 각 점령하며 북한측과의 거래처가 모두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서울에 가지고 있던 생산시설마저 모두 폐허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동화약품은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났습니다. 전쟁 기간에 마산으로 원료와 공장설비를 옮겨 활명수를 계속 생산했고, 경상도와 전라도 남부지역을 대상으로 시장을 넓혀갔습니다. 전쟁 후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와 1955년부터 서울에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60년대 동화약방에게 삼성제약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합니다.
기존의 활명수는 한약 맛이 많이 나고 청량감도 지금의 까스활명수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약에 가까운 느낌이 당시 국민들에게도 친숙했고 신뢰감을 주었기 때문이죠. 삼성제약은 1965년 까스명수를 출시하면서 소화제 분야 1위 기업으로 올라섭니다. 청량음료 느낌의 시원한 탄산감과 단맛을 첨가해 순식간에 시장을 제패하죠. 그리고 이 때 동화약품이 살아있는 전설, 까스활명수를 1967년 출시합니다.
삼성제약과 동화약방은 이제 소화제 시장 전쟁에 돌입합니다. 두 회사는 사활을 걸고 경쟁하며, 전체 광고비 중 절반 이상을 까스활명수 시장에 투입합니다. 그리고 1990년대를 거치며 까스활명수는 시장을 장악하고, 시장 1위 기업으로 군림합니다. 특히 부채표 캠페인이 좋은 효과를 받았습니다. 여러 한방액상 소화제가 난무하자 동화약방은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캠페인을 통해 깊은 역사와 원조의 전통을 전면에 내세우며 성공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산업화와 의약 제품의 발전이 빠르던 서구에서조차 100년이 넘는 기업과 브랜드가 존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활명수는 120년 넘게 우리나라 국민들의 답답한 속을 책임져주고 잇습니다. 민족기업, 독립운동 기업 동화제약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 브랜드로 전혀 부족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