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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은 짧지만 강렬했습니다. 비록 찰나로 끝났지만 1968년의 체코의 봄. 그 순간 만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민 모두는 자유와 평등이란 이름 아래 '행복'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스탈린의 붉은 깃발을 앞세운 탱크의 거대한 포 아래 처참히 무너졌어도 드부체크는, 체코 국민들은, 프라하의 봄은 결코 무력에 굴복한 패배자의 이름이 아닌 영원한 민주화와 자유의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인 1980년 아시아 동방의 작은 나라에도 여느 때 처럼 봄이 왔습니다. 헌데 그 당시 서울에 찾아왔던 봄이란 녀석은 약간 이상했습니다. 극렬한 레드 컴플렉스에 빠져있던 한반도에, 폭압과 군부, 독재라는 녀석에 짓눌러 민주화의 ㅁ, 자유의 ㅈ자도 삐져나오지 힘들던 대한민국에,1980년에 찾아온 서울의 봄은.. 일종의 돌연변이 였습니다.
하긴.. 국내 정세가 뒤숭숭하긴 했습니다. 희대의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당했던 10.26 사태가 발발했던 때가 바로 전년도였거든요. 자칭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의 손에 의해 긴긴 독재는 막을 내리고 그 삭막하던 대한민국에도.. 그 삭막하던 서울에도 '어쩌면..' 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슬슬 피어오르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따사로운 햇살의 봄바람을 타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꽃가루처럼 흩날려갑니다. 대학가의 열정적인 민주화 열망..그 중심에는 매파라고 불리던 대의원회 회장 유시민이 있었고, 비둘기파라고 불리던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이 있었습니다. 자유에 대한 열망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서울대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를 중심으로 서울 부근의 대학생들은 피끓는 열기로 민주화를 목놓아 울부짖었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이란 인간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이에 대응합니다. 허나 이같은 특단의 조치에도 그들의 열망은 사그러들 줄 몰랐고, 그 여세의 절정은 1980년 5월 15일로 이어집니다.
1980년 5월 15일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대학생들의 수는 무려 10만 명이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목적은 오직 하나, 자유 였습니다. 전두환 사퇴' 와 '비상계엄령 해제'를 외치던 그 커다란 에너지는 주위의 시민들조차 감동시키며 흡수시키기에 이르렀고 4.19 혁명 이후 광복 이래 최대 변혁이 올 지도 모른다는 가슴 벅찬 희열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피어났습니다.
어떤 나라라도 국가 발전의 필수요소는 혁명을 수반한다고 했습니다. 혁명이 바로 앞에 다가온 듯 했습니다. 그것도 그 어떤 정치적 배후 없이 오로지 대학생들의 힘에 의해, 그 젊은이들의 열정에 동화된 시민들의 힘에 의해서 말이죠. 이러한 모든 것들을 짚어볼 때도 1980년 5월 15일은 절정의 순간 이었고 결단의 순간 이었으며 역사의 순간 이었습니다.
돌이켜보건데 그 날은 대한민국이 독재와 민주화의 경계선에 한 발 씩 담근 상태로 어느 한쪽 발만 디디면 정세는 완전히 기울어지는 형국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순간, 당시 대학생 지도부였던 매파 유시민과 비둘기파 심재철의 주장은 둘로 나뉩니다.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심재철의 주장 이었습니다.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 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유시민의 주장 이었습니다.
허나, 유시민의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 총학생회 회장 심재철의 발언권보다 파워가 약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인원을 통제하기엔 결국 어느 한 쪽으로 지도부 세력을 모을 수 밖에 없었고 자연스레 총학생회 회장 쪽으로 주도 분위기는 흘러갔습니다.
유시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심재철은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수십만의 대학생들에게 각 학교로 복귀하길 명합니다. 이것이 한국 근현대사 역사상 가장 통탄할 순간으로 기억되는 서울역 회군 이었죠.
예상대로 학생들의 거센 반발이 일었지만 결국 그 많은 인파는 해산되고 뜻이 통하는 몇몇 무리들은 각 학교로 복귀 후에도 철야농성을 하며 시위를 계속했으나 서울역 광장의 그 어마어마했던 물결에 비해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 였습니다.
신군부... 이 때를 놓칠리가 없었습니다. 안 그래도 눈엣가시였던 먹물먹은 대학생들 처리에 골치아팠는데 만날 한데 모여 있어서 통제도 불가능하고 정말 어쩔 수 없이 계엄령만 확대하고 있던 찰나에 알아서 지 발로 해산해 주시니 가장 신바람 난 건 전두환 일당이었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은 더욱더 확대되고 전국 대학교에 휴교령을 내립니다. 각 학교를 급습해 눈에 보이는 대학생이란 대학생은 모두 군홧발로 짓밟아 연행합니다. 지도부가 모여있던 이화여대 회의장을 급습해 학생 대표들을 연행합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는 고립됩니다.
계엄령을 선포한 전두환은 군법정에서 문익환 이문영 예춘호, 고은, 김상현, 이신범, 이해찬, 조성우, 설훈, 송기원, 이석표씨 등에게 내란음모죄로 실형을 선고. 또 서남동, 김종완, 한승헌, 이해동, 김윤식, 한완상, 유인호, 송건호, 이호철, 이택돈, 김녹영, 김홍일(김대중 아들), 김옥두씨 등이 계엄법 위반혐의로 실형선고..
이 재판에서...피고인 대부분이 자백내용을 부인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다리 저는건 박정희때 받은 고문때문이구요...전두환시절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아들들도 제 아부지때문에 고문을 받았다는군요. (김대중전 대통령의 유일한 '흠'인 지나친 자식사랑도 이해가 좀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피고인들이 자신들의 자백내용을 전부 부인하는가운데... 여기서 서울역 회군의 주인공인 심재철씨가... 홀로 자백내용(군사정권이 조작한 거짓혐의)을 죄다 인정해버립니다. 그가 진술하는 도중 법정은 시끄러웠다. 그의 공소사실 인정이 가져올 엄청난 결과에 생각이 미치자 방청하고 있던 가족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한다. "너 미쳤어? 너 왜 그래?"라며 울부짖던 이는 이해찬 총리였다고 합니다.
조성우씨도 그의 허위진술에 대해 포효했다.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만은 "심 동지, 고생 많았지?" 하며 그를 위로했다는 전언입니다. 그 이후...민주화 운동관련자는 변변히 취직도 못하던 그 시절에 관련자 중에서도 아예 주인공급인 심재철씨 는 초능력을 발휘하여 영어교사-문화방송 기자를 거쳐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됩니다. 유시민씨는 지금도 심재철씨가 그때 그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관련자들은 2003년에야 명예회복이 되고 김대중전 대통령은 임기가 끝난 2004년에 명예회복이 됩니다.
[펌] 심재철 의원, 과거를 돌아보자
치사하게 남의 과거를 들추어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심재철 의원의 기가막힌 발언을 접하고 나니 그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은 진보운동가에서 수구보수인사로 순식간에 탈바꿈한 전형적인 변절자이다.
치사하게 남의 과거를 들추어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심재철 의원의 기가막힌 발언을 접하고 나니 그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 심재철 의원은 진보운동가에서 수구보수인사로 순식간에 탈바꿈한 전형적인 변절자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뒤 전두환 장군이 정권을 찬탈할 음모를 꾸미고 있던 바로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 당시 심재철 의원은 민중 해방의 불꽃이라 불리던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었다. 전국의 대학생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군사독재의 종식과 민주주의 쟁취를 부르짖던 그 때 그 유명한 '서울역 회군' 사건이 일어난다.
엄청난 인파가 몰려 "독재 종식"을 외치며 서울역까지 행진한 이후 당시 심재철 서울대 총학생회장은 '계엄령이 내려진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학생운동 지도부에게 "모두 시위를 접고 학교로 돌아가 정치권과 군부의 결단을 기다리자"며 한발 물러선 의견을 펼쳤다고 한다. 결국 서울의 10만에 다다르는 시위대는 모두해산하고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서울의 결정의 따르지 않고 한치의 타협없이 민주화를 부르짖던 전남대를 중심으로 한 광주는 결국 전두환 집권을 위한 본보기로써 피로 물들게 되었다.
이후 심재철 의원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조작한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고문을 이기지 못한 심재철 의원은 군사정권이 조작한 거짓혐의들에 대해 모두 시인하고 그의 진술은 이 조작사건이 '사실'로 둔갑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고 만다.
△80년 광주는 외롭게 싸웠다.
물론 서울의 봄 당시 심재철씨의 판단이 단순히 나약한 지식인의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쉽게 치부해버리고 싶지 않다.
당시의 판단에도 논리적이고 합당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운동 지도부들 역시 그 결정에 따르지 않았을까.
조작사건에 대해 모든 혐의를 시인한 것에 대해서도 변절자라고 쉽게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싶진 않다. 인간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군사독재의 모진 고문속에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아마 내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하더라도 그 고문을 이겨냈을거라고 결코 자신할 수 없다.
그러나 20대의 청춘에 꿈꿨던 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그 사건 이후 순식간에 군사독재 정권의 나팔수로, 보수정치의 행동대장으로 뒤바뀐 것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남자. 그는 다른 386들이 대통령 직선제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쟁취된 이후 서서히 변절해갔던 것과는 달리, 군사독재가 끝나기 전부터 당시 군사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던 문화방송에 입사해 출세가도를 달렸으며 곧 자신을 고문했던 한나라당의 정치인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이후 미선이 효순이 사건, 이라크 파병 등 전국민적인 사회이슈가 있을 때마다 한나라당의 입장을 가장 직접적이고 거칠게 표현하는 "행동대장"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자신의 사상이나 정견이 바뀐 것에 대해서는 뭐라 할말이 없다손 쳐도, 분명 그의 이런 모습이 좋아보일리는 없다. 동지들과 사상에 대한 배신의 자격지심이 오히려 지난날 자신의 모습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과 공격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면 너무 과도한 해석일까.
90년대 중반까지 진보 운동을 하던 이들이 느닷없이 "뉴라이트"로 변신하여 친일교과서와 함께 화려하게 나타났다면, 심재철 의원은 마치 뉴라이트의 아버지와 같은 모습이다. "광우병 쇠고기로 만든 등심 스테이크를 먹어도 100% 안전하다" "촛불집회와 탄핵 서명운동 배후에 불순한 정치세력이 있다"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광주에서 고정간첩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니체가 그런 말을 했었나. "괴물과 싸울 때는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하라"고.
심재철 의원에게 주제넘는 충고를 하나 하고 싶다. 혹, 지금 자신의 모습이 젊은 날의 순수했던 시절에 맞서 싸우던 그 괴물의 모습과 너무 닮아가고 있지 않은지 돌이켜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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