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 장벽, 사소한 말 실수로 무너지다
베를린 장벽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가르고, 동독과 서독을 분단시킨 20세기 유럽 최후의 인공 장애물이었습니다. 벨른린 장벽은 동독 주민의 서독 이주를 저지했고, 서독의 민주주의가 동독으로 파급되는 것을 오랜 세월 막아왔지만 1989년 11월 9일 밤 장벽은 결국 허물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거대한 국가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가르던 베를린 장벽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사람의 작은 말 실수로 인해 무너집니다. 동독의 신임 대변인에 의해서 말이죠.
■ 기자회견에서 시작된 베를린 장벽 붕괴
1989년 11월 9일 저녁 6시. 당시 동독 정부는 일상적으로 매일 여는 기자회견을 시작했습니다. 공산권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던 긴박한 시국인지라 수십여명의 기자들이 참석했고, 기자회견은 동독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되었습니다. 기자회견에는 4명의 장관급 고위간부가 브리핑에 나섰고, 이제 막 정부 대변인으로 임명된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도 배석했습니다.
하지만 신임 대변인 샤보브스키는 여행법 정책 변경 과정에는 참여하지 못했기에 새로운 여행법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에곤 크렌츠 서기장이 건네준 여행법 개정안 서류만 들고 나왔을 뿐입니다. 동독 정부는 원래 비자를 의무적으로 취득한 후 조건부 출국을 계획했고 국경 인프라는 현 상태 그대로 유지할 생각이었습니다.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동독, 서독의 왕래를 자유롭게 할 생각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지루한 기자회견이 끝날 무렵인 오후 6시 53분, 여행법에 대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앞줄에 있던 어느 기자가 “동독인들은 언제쯤 자유롭게 서독으로 여행할 수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동독의 대변인 샤보브스키는 여행법 관련 서류를 반쯤 읽고 대충 해석하고 있었습니다. 샤보브스키는 “그들이 원하는 곳이면 아무데나 갈수 있고, 아무도 그들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 법은 언제부터 발효됩니까.” 샤보브스키는 주저하다가 ”내가 알고 있기로, 지금 당장입니다“(Das tritt nach meiner Kenntnis…ist das sofort…unverzüglich)고 대답했습니다.
사실 샤보브스키는 개정된 여행법을 잘 몰랐습니다. 동독 정부의 여행자유화조치는 몇 달간에 걸친 주민들의 시위에 대한 대응 조치로, 과거의 조치에 비해 새로운 내용이 거의 없었으며, 굳이 새로운 것을 들자면 여권 발급기간을 단축하는 정도였으며 시행 시기도 다음날이었습니다.
동독 정부가 임시방편으로 만든 조치였는데, 대변인이 법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TV카메라 앞에서 ”지금 당장 여행자유화조치를 시행한다“고 발표해버린 것입니다. 회견이 끝나고, 샤보브스키는 미국의 NBC 방송의 기자 톰 브로코(Tom Brokaw)와의 인터뷰에서 ”동독인들은 베를린 장벽을 통해 이주할수 있으며, 이 규정은 당장 효력을 발생한다“고 재차 강조하고 맙니다.
■ 베를린 장벽 붕괴의 과정
한반도의 상황과도 비슷한데, 당시 동독 주민들은 동독 방송을 거의 시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충격적인 기자회견의 생중계 직후에는 큰 소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인 소동은 서독의 뉴스 방영 이후 일어났습니다. 서독 국영방송 ARD의 저녁 메인뉴스 Tagesthemen 앵커가 22시 45분 샤보브스키의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은 멘트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11월 9일은 역사적인 날입니다. 동독 당국이 모든 국경이 즉각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다고 발표했습니다. 장벽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방송을 본 동독 서독 주민들이 장벽에 설치된 검문소로 몰려나왔습니다. 동독 정권은 당황해서 국경수비대에 더 엄격하게 출입을 관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동베를린 시민들은 베를린 장벽을 지키던 국경수비대는 ”우리 동독의 대변인 샤보브스키가 당장에 문을 열어라고 했다“고 항의했습니다.
수비대는 긴급히 상부에 전화해 지침을 내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이 전대미문의 사태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군중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져서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밤 10시 45분, 보름홀머거리 검문소(Bornholmer Straße border crossing)의 수비대장 하랄트 얘거(Harald Jäger)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바리케이트를 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수비대가 바리케이트를 열자 동베를린 사람들은 서베를린을 향해 모두 달려갔습니다.
서베를린 검문소 부근에는 서독 사담들이 동쪽에서 온 동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동쪽에서 온 시민들에게 꽃을 건네주고 따뜻하게 포옹하며 샴페인을 터트렸습니다. 삼엄했던 베를린 장벽은 군중들이 나팔을 불고 춤추고, 환호하는 파티장이 되어 버렸고, 동과 서를 가로막던 베를린 장벽은 이렇게 무너졌습니다. 발표 이후 3일 동안 동독에서는 서독행 여권 430만 매가 발행되었고, 10일 동안에 동독인구의 절반이 넘는 1천만여건의 사증이 발급되었다고 합니다.
■ 장벽 붕괴에 대한 동독의 대처
이러한 세기의 실수에 대해 동독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동독 지도부는 샤보브스키의 실수를 되돌리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국가, 일반적인 관료제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실수가 왜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① 파탄 상태의 동독 경제, 지지가 필요했던 동독 서기장
당시 사회주의통일당 서기장에 오른지 한달도 되지 않은 크렌츠는 시민들의 지지를 절실했습니다. 당시 동독은 국가 부채가 엄청난 수준이었고, 당시 경제전문 그룹의 대표인 게르하르트 쉬러가 신정부에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라고 보고할 정도였습니다. 동독 경제는 40년간의 공산 체제로 인해 심각한 상태였으며 제조업 생산력은 서독의 25~30% 수준에 머물렀다. 마치 북한과 대한민국처럼 동독 주민들도 서독의 TV를 보고, 서독의 제품을 구매하는 상황이였습니다.
1980년대 들어 공산권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공산권 전체의 경제가 피폐해졌습니다. 또한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공산권 국가들은 각자도생의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였기에 동독이 소련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엇습니다, 만약 스탈린 시절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동독 관련자들은 모두 사형을 당했겠지요.
② 터지기 직전인 동독 주민들의 불만
당시 동독 주민들의 불만은 엄청난 수준이었으며, 국경 수비대는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청년들을 막기에 급급했습니다. 독일의 일요신문 벨트암존탁은 동독 국민 150만명이 서독으로 이주하고 싶어한다고 보도했고, 동독의 철권 통치자 호네커 서기장도 더 이상의 국경탈주를 막을수 없어 발포 행위를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장벽 붕괴 1달 전인 10월 9일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에서는 무려 7만 명이 운집하여 여행의 자유화 등을 외쳤습니다. 당시 동독 당국은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해 무력을 사용할 계획이었으나 (앞서 그해 6월 또다른 공산국가인 중국에서 벌어진 천안문 사태는 무력에 의해 진압됨) 군중이 너무 많아 무력 사용이 불가하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호네커 서기장이 물러나고 신임 에곤 크렌츠 서기장이 취임한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다음날, 크렌츠 동독 서기장은 베를린 주재 소련 대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다. 소련측은 너무 성급한 조치가 아니었느냐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이미 쏟아진 물을 다시 담기 어렵다는 현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들로써도 모스크바에서 강력한 통제가 없는 상황에서 특별한 질책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12월 22일 동서 베를린의 경계에 있던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리고 그날 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그 문을 걸어서 넘어, 건너편에서 기다리던 한스 모드로(Hans Modrow) 동독 총리의 영접을 받았습니다.동서독을 가로막았던 장벽은 공식적으로 1990년 6월 동독 국경수비대에 의해 완전 철거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