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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징기스칸의 도원결의, 발주나 맹약

by 지식노트 2022.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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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지배했던 정복왕 징기스칸은 온갖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난 인간승리의 화신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징기스칸이 겪은 큰 사건 중 '발주나 맹약'은 징기스칸과 몽골 제국의 가장 큰 변곡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89년 27살의 징기스칸은 옹 칸의 승인 아래 전통적인 씨족, 부족회의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칸의 칭호를 차지합니다. 이어 천신만고 끝에 메르키트,타이치우드족을 누르고 초원의 차기 지배자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당시 초원의 최강자이자 부친의 친구인 케레이트 부족의 부족장 옹 칸은 신흥강자 징기스칸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옹 칸은 젊은 시절 부족원을 모두 잃고 징기스칸(테무진)의 아버지인 예수게이에게 도움을 받은 뒤, 의형제를 결성하여 징기스칸에게는 양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으나 애초에 권력은 아들과 아버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1203년 징기스칸이 옹 칸에게 자기 장자인 주치에게 옹칸의 딸을 처로 달라고 청하자 옹칸은 대노하게 됩니다. 옹칸 입장에서는 새파랗게 양아들 징기스칸이 자신을 만만하고 우습게 보기 때문에 감히 자신의 딸을 며느리로 달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옹 칸은 징기스칸을 죽이기로 결심하고 거짓으로 딸을 준다고 꾀어낸 다음 징기스칸을 습격합니다. 며느리를 맞이하러 가던 징기스칸은  옹 칸의 속임수에 빠진 것을 뒤늦게 눈치 채고 부하들과 함께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합니다.

몇날 며칠을 정신없이 도망친 테무진이 도착한 곳은 동쪽의 발주나 호수였습니다. 발주나 호수에 이르자 끝까지 테무진을 수행하던 사람들은 겨우 19명만 남아있었습니다. 몽골의 떠오르는 태양이자 수천, 수만명의 군대를 거느린 테무진에게 겨우 19명의 수행원만이 목숨을 걸고 그를 따라왔던 것입니다.

징기스칸은 발주나 호수에서 그를 따르던 19명의 인물들과 맹세를 합니다. "나로 하여금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업을 이룩하도록 도와주소서.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이 모든 사람들을 기억하소서. 만일 내가 이 말을 어기면 이 흙탕물처럼 되게 하소서”라고 맹세하며 발주나 호수의 흙탕물을 나눠마십니다.

 

몽골 기병

역사적으로 발주나 맹약이 주목받는 이유는 징기스칸의 영화같은 일대기를 조명하는 차원도 있지만, 그보다는 참여한 19명의 출신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이 더 큽니다. 19명 중 징기스칸의 친인척은 친동생 카사르와 벨구테이 뿐이었고, 나머지는 서로 다른 9개 부족 출신이었으며 심지어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불교도, 샤머니즘 등 다양한 종교를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사용하는 언어도 몽골어, 타타르어, 투르크어, 위구르어, 아랍어 등 중구난방이였으며
몽골 부족과 적대관계인 메르키트, 케레이트 부족원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종교, 언어, 인종이 모두 다른 19명의 부하들은 징기스칸을 매개체로 결사체를 이루고, 이를 눈앞에서 목격한 징기스칸은 비록 언어와 종교가 다를지라도 모두가 형제라는 커다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발주나 맹약을 토대로 징기스칸의 군사전략과 후에 건립할 거대 제국의 기본적 틀도 변화하게 됩니다. 그 후 징기스칸은 씨족이나 혈족중심사회가 아니라 능력과 신의에 따라 등용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유지했으며, 적이라 할지라도 패배하고 충성을 다짐할 경우 노예가 아니라 대등한 시민으로 대우했을 뿐 아니라 관직의 임용에서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몽골 제국의  통치조직인 천호제, 군사조직 케식텐, 법령 대자사크는 물론 종교 및 인사에서도 탕평적 사고와 현지화 정책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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