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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문화&스포츠

충무로가 한국 영화의 성지가 된 이유

by 지식노트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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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의 기대주, 충무로의 떠오르는 샛별, 충무로에 입성하다 등등. 충무로는 한국 영화의 상징적인 곳이며, 충무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가 연상이 될 정도로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충무로는 언제부터 한국 영하의 성지가 되었을까요? 

(1) 일본의 유화정책, 충무로 영화의 시작

충무로가 한국 영화의 발상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약 100년도 더 전인 1906년 경성부 진고개 부근의 '송도좌'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했을 당시로 되돌아갑니다. 중구문화원에서 발간한 서적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 따르면 이것을 시작으로 1910년 경성부 황금정(현 외환은행 본점)에 '경성고등연예관'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가 충무로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것은 전두환 신군부의 3S 정책과 유사하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의 적개심과 분노를 유화책으로 무마하기 위해 영화 산업을 의도적으로 도입한 일제의 정책입니다.

그 뒤를 이어 1914년에 '제2대정', 1916년에 '경성극장', 1917년에 '낭화관', 지금의 충무로 5가에 '조일좌', 1922년에 초동에 '수좌'(후에 경성촬영소), 현재 중앙시네마가 된 '중앙관'등이 줄줄이 충무로와 명동, 종로 일대에 등장합니다. 이어 1935년 현재 아시아미디어타워 부지에 설립된 '와카쿠사(若草)극장'이 등장하며 충무로는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충무로 영화

 

(2) 해방 이후 충무로로 모인 영화인들

필름의 원거리 이동이 쉽지 않은 시대를 고려하여 극장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것은 곧 영화사, 필름 현상소를 비롯해 영화 관련 업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이도록 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도 영화인들은 충무로에 모였고 당시 충무로에 있던 대원호텔은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지방 흥행사들의 숙소로 언제나 만원이었습니다. 

1950년대 후반 충무로에 들어선 영화사는 71개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지금 남산골 한옥마을 자리에 당시 부산에 있던 국방부 영화촬영대가 시설과 기자재를 옮겨와 ‘필동 촬영소’ 시대를 열게 됨으로써, 충무로는 명실 공히 한국영화의 메카로 자리잡게 됩니다.

1950년대부터 진정한 충무로의 전성기가 시작되어 많은 영화관들이 문을 엽니다. 충무로 3가 부근에는 스카라극장(현 아시아미디어), 그 대각선 방향에 명보극장, 충무로2가 부근에 중앙극장(현재 폐쇄), 충무로4가 부근인 퇴계로에 대한극장, 을지로4가에 국도극장(현 국도호텔), 을지로2가에 을지극장(폐쇄) 등이 들어섭니다.

가까이 있는 종로3가에 단성사, 피카디리극장, 서울극장, 종로2가에 허리우드극장, 세종로에 아카데미극장(현 코리아나 호텔)  국제극장(현 동화면세점) 등이 자리잡았습니다.

1960~70년대 충무로에서는 연간 100편이 훌쩍 넘는, 어떨 땐 200편을 넘는 한국영화가 제작되었습니다.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제작하도록 한 영화법 때문에 연 100편이 넘는 한국영화는 계속 제작되어야 했으니, 일정 수 이상의 제작인력이 필요했고, 그들이 일할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원로 영화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충무로에 나가면 모든 볼 일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영화 관련자들이 충무로에서 일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3) 충무로 영화산업의 몰락

1980년대 중반부터 충무로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합니다. 대작 블록버스터 미국영화를 배급사가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한국 영화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영화사들도 대부분 강남 등 다른 지역으로 이전합니다. 국제극장, 국도극장, 을지극장, 스카라극장, 단성사를 비롯해 많았던 소형 영화관들도 대부분 사라진 지금의  충무로는 더 이상 영화인들이 모여서 일하는 공간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서울시와 중구청은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를 개최하고, 충무로 영화의 거리 등을 조성하는 등 충무로 재건을 위한 노력도 하고 있지만 충무로에서 더 이상 과거의 전성기 영화 산업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충무로는 한국 영화의 상징으로 남아있고, 많은 영화인들에게 '충무로'라는 세 글자는 그들이 꿈과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게 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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