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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환관과 내시, 비슷해 보이는 두 단어의 차이점은?

by 지식노트 2022.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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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궐내에서 일하던 거세된 남자들

 

과거 왕들이 국가를 통치하던 시기에는 거세한 남자들이 궁궐에서 근무했습니다 이들을 환관과 내시라고 부릅니다 궁궐에는 왕비, 후궁, 궁녀 등 수 많은 왕의 여자들이 거주합니다 왕의 여자들은 왕이 아닌 다른 남자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죠. 그래서 이들과 가까이하며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내시들은 남자로서 성적 기능을 할 수 없도록 거세한 자만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 다른 업무를 수행한 환관과 내시

환관과 내시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서를 들여다보면 궁궐 내에서 왕이 듣기 좋은 말만 하며 신하들의 충언을 막는 악역으로 등장하곤 합니다. 환관과 내시는 거세한 사람으로 알려져 같은 취급을 받지만 사실은 엄연히 다른 직책이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에 와서 두 직책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같은 것으로 인식이 되곤 합니다.

'성 기능을 없애어 궁궐 안에서 직책을 수행하는 남성' 은 환관입니다
특히 중국 역사에서 '환관의 정치'는 대단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삼국지' 에서 등장하는 십상시(十常侍)입니다. 후한 말 나이 어린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자기들의 욕심대로 나라를 운영하려한 열명의 환관들이 십상시입니다

□ 고려의 엘리트 집단, 내시

우리나라에서 환관은 그 정도 위치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고려시대 환관은 궁중의 잡역을 담당했던 직책으로 노비나 관비, 소생 출신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종7품 이상 관직에는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정말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직책은 바로 내시입니다. 고려시대 내시는 거세한 남성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과거나 음서로 벼슬에 오른 문벌귀족의 자제들현재로 따지면 청와대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비서관, 행정관들과 같이 왕을 보필하여 나랏일을 수행하는 최측근 비서들이었습니다.

당시 내시가 되는 것은 최고위직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고려의 대표적인 내시들로,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구재학당을 연 최충의 손자 최사추, 동북 9성을 세운 윤관의 아들 윤언민 무신시대 집권자 최충헌의 사위 임효명 등등 이름만 들어도 정말 당대의 최고 권력자들의 자제들입니다.

당시 내시는 조정 내 최고위 직책에 오르기 전 거쳐가야하는 젊은 귀족 자제들의 엘리트코스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선출직에 도전하려면 청와대 비서실을 경험해야 프리미엄이 붙는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 고려말, 환관의 내시화

이러한 환관과 내시의 구분이 확실했던 시기를 지나 무신 정권기와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이들의 구분이 모호해집니다 환관의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며 왕의 신임을 얻은 환관이 내시로 임명되는 경우가 생겼기 때문이죠.

환관의 내시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고려 말 공민왕 때입니다. 환관 업무를 담당하는 관청 '내시부'가 신설되며 공식적으로 환관과 내시의 구분이 없어지고, 환관들이 더욱 득세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고려말의 환관 정치를 본 이성계와 정도전 등 조선의 건국자들이 내시의 정치 참여를 원천 봉쇄해버리고 과거제도를 통해 등용된 관료들을 활용하는 관료제를 국가 원칙으로 삼으며 환관 정치는 종말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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