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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징2

인재를 구하는 방법, 재주와 덕을 겸비한 '재덕론(才德論)' 중국은 수천년 역사의 흥망성쇠를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학과 인물을 다스리는 용인술을 통해 제국의 발전을 꾀해 왔습니다. 북송(北宋) 중기의 정치가이자 사학자인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제왕학의 교과서로 알려진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저술하며 '재덕론(才德論)'을 펼쳤습니다. "재덕(才德)을 겸비하면 성인(聖人), 재주도 없고 덕도 없으면 어리석은 자(愚人), 덕이 재주를 능가하면 군자(君子), 재주가 덕을 능가하면 소인(小人)이다." 사마광의 이 같은 분석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좌구명(左丘明)이 지은 역사서 '국어(國語)'에 기록된 다음 일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진(晉)나라의 막강한 가문의 수장이었던 지선자(智宣子)가 아들 지요(智謠)를 후계자로 삼고자 하였습니다.그러자 친족인 지과(.. 2022. 7. 21.
당태종 이세민(唐 太宗 李世民)을 불후의 군주로 남게 한 참모, 위징 당(唐) 태종(太宗)과 위징(魏徵)의 관계는 인재를 어떻게 구하여 쓰고, 그리고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일천삼 년을 훌쩍 뛰어 넘는 시대의 간격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큰 가르침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당 태종의 최측근이라고 할수 있는 방현령은 51번 언급되는 반면에, 위징은 무려 101번 나와 태종의 “정관(貞觀)의 치(治)”에서 차지하는 위징의 비중을 가름하게 합니다. 위징은 본래 당 고조(高祖)의 태자인 이건성의 책사로 이세민을 죽일 것을 간했다고 합니다. 당의 건국에 이세민의 공이 가장 컸음에도 불구하고 적장자 후계 명분에 밀려 맏아들 이건성이 태자로 책봉되자, 이세민의 불만으로 인해 왕자들 간의 권력 투쟁이 심각해집니다. 결국 이세민은 황제의 이름을 빌려 형제.. 2021.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