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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국회

국가가 조작한 간첩, 앙드레 드레퓌스 사건

by 지식노트 2022.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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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대 프랑스는 총체적 난국에 빠져있었습니다. 1871년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는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승전국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황제 대관식을 가지며 프랑스에게 엄청난 굴욕감을 안겨줍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지역을 뺐기고,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내야했던 프랑스인들의 분노는 엄청났습니다. 전쟁 패배 후유증 국가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어 많은 프랑스 투자 은행들이 파산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당시 피해를 본 많은 투자자들은 로스차일드 같은 유대계 금융 기업에 대해 분노했고 유대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됩니다. 여기다 더해 1892년 파나마 운하 회사 파산 사건이 일어납니다. 수천 명의 피해자들이 발생한 파산 선고에, 회사의 개발 업체 선정 과정에서 정치권에 막대한 로비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를 주도한 회사의 경영진이 모두 유대인이라는 사실에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 반유대 정서가 강하게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반유대인 정서가 만들어지고 있던 1894년 9월, 프랑스 정보국은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 심어놓은 정보원으로부터 독일 무관의 휴지통에서 찢어진 명세서를 건네받습니다. 프랑스 육군 대포 개발 현황, 부대 배치도 등 1급 기밀 자료 목록을 열거한 명세서였습니다. 이 명세서의 발신인에는 '비열한 D'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프랑스 정보국은 명세서에 언급된 기밀에 접근할 정도면 육군참모본부 소속 대포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정보국은 용의자를 찾아가던 과정에서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에 주목합니다. 비열한 D에서  D를 드레퓌스라고 보고 수사에 착수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당시 프랑스 정보국장 상테르 대령은 참모본부 소속이자 유대인이였던 드레퓌스를 사실상 스파이로 단정하고 수사를 개시합니다.

드레퓌스가 스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지만 심증만으로 드레퓌스는 군사 재판에까지 회부됩니다. 드레퓌스의 변호인은 공개 재판을 요구했지만 재판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비공개로 결정합니다. 증거가 없는 재판이 드레퓌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자 군 당국은 부담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때 프랑스 정보국의 앙리 소령이라는 증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드레퓌스가 스파이라는 확실한 제보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제보자의 신원을 밝히는 것은 거부합니다. 재판부는 확인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앙리 소령의 말을 인정하여 드레퓌스에게 유죄 선고를 내리고 불명예 제대와 종신 유배형에 처한다고 판결합니다. 법원은 항소로 허락하지 않은 드레퓌스를 남미의 외딴 섬에 유배시킵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

프랑스 군 당국과 국민들은 유대인이었던 드레퓌스가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사실상 단정하고 있었으며, 재판 결과에 대해서도 권선징악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15개월이 지나 프랑스 군 정보국장으로 새롭게 부임한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드레퓌스 사건 당시 독일 대사관 무관이였던 슈바르츠코펜이 외부로 발송하려다 폐기한 문서 한 장을 입수합니다, 그 문서의 수신인은 프랑스 육군 보병대대의 장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이었습니다. 피카르 중령은 에스테라지 소령과 드레퓌스 사건 당시의 명세서 필적을 전문가에게 의뢰하고, 필적이 동일하다는 의견을 받았습니다. 

피카르는 이러한 의견을 근거로 삽우에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했지만 답변은 놀랍게도 사건을 덮어두라는 것이였습니다. 드레퓌스가 진범이 아닐 경우 프랑스 군당국에 대한 신뢰와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군대내 기밀이 외부로 유출될 수 있다는 지시였습니다. 피카르는 당연히 부당한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었고, 그러한 의향을 내비치자마자 피카르는 프랑스령 튀니지로 한 순간에 좌천됩니다. 하지만 군 정보국장까지 했던 사람이 순순히 당하고 있을리만은 없죠, 피카르는 친구이자 변호사 루이 르블루아에게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려줍니다. 르블루아는 평소 친분이 있던 상원 부의장 슈레르 케스너에게 드레퓌스 사건의 재조사를 요구합니다.

이제 사건이 다시 커지게 됩니다. 케스너 부의장은 1897년 의회에서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연설과 함께 재조사를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프랑스 육군은 정치권의 입김에 큰 부담을 느끼고 피카르 중령을 군사 기밀 유출죄로 체포합니다. 하필이면 국민 여론도 좋지 않아 국민들과 언론들은 유댕니이었던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에 반대했고, 오히려 드레퓌스와 그 가족들에 대해 험담하며 반유대인 정서를 강화하는데 혈안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승리한다던가요, 드레퓌스 사건이 몇 몇 언론사들의 취재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고, 프랑스 지식인들이 나서기 시작합니다.

수 많은 지식인들이 정부와 군 당국에 대해 비판을 하기 시작했고, 당대의 소설가 에밀 졸라는 어느 신문사에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 를 기고하며 드레퓌스 재판을 '상상할 수 없는 최악의 조작'이라고 비판합니다. 당시 반유댕니 정서가 얼마나 강했냐면 에밀 졸라는 이 기고문으로 인해 영국으로 도피해야 했고, 훈장도 박탈당하게 됩니다. 프랑스 국민들의 반유대 정서는 여전했지만 지성인들의 끊임없는 진실 요구에 결국 정부는 항복합니다. 재조사가 시작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드레퓌스가 스파이라는 허위 제보를 한 앙리 소령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또한 문서 조작 행위 등을 지시한 장군이 드러나면서 사건의 전모가 서서히 밝혀지게 됩니다.

드레퓌스 사건이 조작되었음이 밝혀지자 에밀 졸라도 귀국했고, 피카르 중령도 감옥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1898년 9월 프랑스 정부는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결정하고 군사재판을 다시 열어야 함을 공식적으로 밝힙니다. 그러나 재심 군사법원은 그때까지도 자신들의 조직 보위를 위해 드레퓌스에게 죄가 있다는 취지로 신문했고, 5대2의 결정으로 드레퓌스에게 징역 10년의 유죄를 선고합니다. 그러나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잇어 특별 사면을 받도록 하겠다고 드레퓌스에게 제안합니다.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기는 싫지만, 유배되어 있던 당사자의 심리를 악의적으로 이용한 정말 나쁜 짓이죠. 죠. 자유가 그리웠던 드레퓌스는 제안을 받아들여 상고를 포기하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했던 많은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정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덮으려고 재판을 가지고 협상을 하고, 사면을 내렸다며 엄청난 비판을 쏟아냅니다. 드레퓌스 역시 자신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사면 혜택을 반납하고 재심을 요청합니다. 국방부는 결구 전면 재조사를 실시했고, 1906년 프랑스 최고 항소 법원에서 드레퓌스 사건의 최종 무죄를 선고합니다. 드레퓌스는 복직 명령이 내려졌고, 그 다음 날 프랑스 하원은 드레퓌스에게 프랑스 최고 훈장을 수여하고 소령으로 복직시킬것을 명령합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반유대인 정서, 인종 차별적 정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전쟁 패배로 인한 적대감과 복수심, 경제 위기 속에서 터져나온 반유대인 정서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국민성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대다수 국민들은 드레퓌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스파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고 법원과 군 당국은 악의적이고 의도적으로 증거를 조작하여 그를 범인으로 몰고갑니다. 그러나 결국 최후의 보루는 지성인들이였습니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정신 위에 세워진 나라를 지켜가기 위해 끝가지 싸운 지식인들은 덕분에 드레퓌스는 풀려났습니다.

프랑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가 반으로 나뉘어 큰 갈등을 겪었지만 자유, 박애, 평등, 똘레랑스 정신이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의 민주주의 발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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