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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집&노포

[먹자골목 시리즈] 26. 을지로 노가리골목

by 지식노트 2022.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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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시청, 을지로 등 서울에서 직장인 숫자로는 남 부럽지 않은 지역에 서울 야장의 성지가 있습니다. 을지로3가역 4번 출구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밤이면 밤마다 '야장, 노상' 에 노가리에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야장이란 밤에 간이 테이블을 꺼내놓고 장사하는 임시 영업을 의미합니다. 휘황찬란한 전등 불빛에 플라스틱 테이블을 깔고 수백명의 손님들이 500㏄ 생맥주를 마시는 장면은 가히 '맥주 천국'이라고 부를만합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을지로 노가리 골목이 시작된 것은 어연 40여년의 역사를 자랑합니다. 이 골목에서 가장 작고 낡은 집, 지금은 없어진 집 을지 OB베어입니다. 1980년 11월 지금은 은퇴하신 을지OB베어 강효근 사장이 최초의 노가리 호프집 을지OB베어를 열었습니다. 을지로는 지금은 골목 자체가 영세해졌지만 원래는 전국 최대 규모의 인쇄골목으로 유명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유통되는 모든 책과 유인물 등이 을지로에서 유통되었습니다. 납기를 맞추려고 밤샘 근무하는 인쇄 종사자들이 많았고, 교대하고 집에 가기 전 얼른 들려 노가리에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며 회포를 풀었던 장소입니다.

을지OB베어를 시작으로 만선호프, 뮌헨호프 등 맥주 가게들이 하나 둘 씩 들어섰고, 어느덧 노가리 생맥주 골목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골목이 들어섰을 당시에는 연탄불에 직접 노가리를 구워 고추장과 함께 내놓았지만 현재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있는 많은 가게들은 노가리 뿐만 아니라 호프집처럼 치킨, 찌개류, 튀김류 등 다양한 안주를 내놓습니다. 

을지로 가게들이 처음부터 야외에서 먹는 노상이 가능했던 것은 아닙니다. 통상 4월~10월에 야외 영업을 하기는 했었지만 엄연히 옥외 불법 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구청에서 정식으로 옥외 영업을 허가하였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대형화가 시작되게 됩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

을지로 노가리골목을 찾아 골목길로 들어서면 붐비는 인파와 퍼져나가는 불빛으로 인해 저기 멀리서부터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야장이 가능해지는 봄부터 너무 추워서 야외에서 먹기 힘든 늦가을까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은 수 백명의 인파가 몰려 발디딜 틈이 없습니다. 좁은 골목에 빼곡히 들어찬 간이 의자 사이론 생맥주와 안주를 나르는 직원들의 손길이 분주합니다.

 

을지로 노가리, 맥주

 

주력 메뉴는 당연히 노가리와 생맥주입니다. 누구든 맨 처음에는 커다란 맥주 전용 잔에 담긴 500cc 생맥주 한모금으로 시작을 합니다, 정말 시원하고 맛있습니다. 노가리 가격은 하나에 천원에서 천오백원, 정말 저렴합니다. 안주 가격에서 이윤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맥주를 더 시켜먹으라는 가게의 속셈을 알지만, 저도 모르게 생맥주를 추가하게 됩니다.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야외에서 먹는 생맥주 맛이 어찌 맛이 없겠습니까?

제가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다닌지 10여년이 된 것 같습니다. 멋모르던 대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호기롭게 노포 투어에 나서자며 데려간 을지로 노가리 골목, 그때는 60대 이상 어르신들의 성지에 침투한다는 설레임이 있었습니다. 어르신들 사이에 껴서 생맥주와 노가리를 먹으며 나도 노포를 즐기는 아날로그 세대라는 자부심어린 생각에 희죽거리며 맥주를 마시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가리 골목의 주 고객층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요즘 노가리 골목은 20대 초중반 학생들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포진한 20대 초반 어린 학생들에 의해 압도감과 질식감을 느낍니다. 퇴근한 직장인들과 세월을 찾아 오신 어르신들이 일부 뒤섞여있기는 하지만 맥주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이 왠지 더 이상 그들을 이 골목에서 보지 못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합니다. 

 

을지OB베어 강제집행

2022년 4월 이루어진 을지OB베어의 강제집행도 저를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서 한 발자국 멀어지게 합니다. 현재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반 이상은 사실 '만선호프' 소속입니다. 을지로 노가리 골목에 새로 들어온 후발주자 만선호프는 2014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며 대형화, 기업화에 나섭니다.

2016년 이후 슬금슬금 주위의 다른 가게들을 인수하여 만선호프로 간판을 바꿔달고, 2021년에는 만선호프 바로 옆 노가리 골목의 원조 을지OB베어가 있던 건물의 지분을 매입하더니 그 때부터 을지OB베어에게 나가줄것을 요구합니다. 수 차례에 걸친 내용증명과 법적 다툼 끝에 2022년 4월 을지OB베어는 강제집행을 당하며 쫓겨나고 맙니다. 을지OB베어 자리에 화장실을 만들겠다고 인터뷰했던 만선호프 사장의 옹졸한 인터뷰와 함께 말이죠.

제가 정말 사랑하고 애정하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 2015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던 때의 모습은 이미 찾아보기 힘듭니다. 힙한 것과 트렌디한 것은 때로 좋으나 자정 능력이 없는 거리는 궁극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귀결됩니다. 사랑하고 좋아하는 거리가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하며,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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