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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2

충무로, 이순신 장군의 생가터 충무로는 명동과 함께 일제강점기 시절 '혼마치'로 청계천 아래 일본 상인들의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은 '마른내'라고 불리는 작은 실개천이 흘렀습니다. 비가 오면 목멱산(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로 냇물이 되고, 고갯길은 질척질척한 진고개가 되었습니다.마른내가 있어서 붙여진 옛 이름은 '건천동'입니다. 건천동에서 태어난 위인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서애 유성룡' 입니다. 이순신은 마른내에서 말을 타고 활쏘기를 하며 무예를 배웠고, 무과 시험에 임했습니다. 시험을 보다가 말에서 떨어진 이순신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내 다친 다리를 감쌌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충무공 이순신의 생가터가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일본 상인들의 중심지였던 이곳을 충무공의 이름으로 다시 불러주니 '충무로'라는 거리의.. 2024. 11. 5.
충무로가 한국 영화의 성지가 된 이유 충무로의 기대주, 충무로의 떠오르는 샛별, 충무로에 입성하다 등등. 충무로는 한국 영화의 상징적인 곳이며, 충무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가 연상이 될 정도로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충무로는 언제부터 한국 영하의 성지가 되었을까요? (1) 일본의 유화정책, 충무로 영화의 시작 충무로가 한국 영화의 발상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약 100년도 더 전인 1906년 경성부 진고개 부근의 '송도좌'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했을 당시로 되돌아갑니다. 중구문화원에서 발간한 서적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 따르면 이것을 시작으로 1910년 경성부 황금정(현 외환은행 본점)에 '경성고등연예관'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영화가 충무로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이것은 전두환 신군부.. 2022. 9.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