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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술

대한민국 맥주 역사 (두산OB/하이트)

by 지식노트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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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맥주 시장은 오비와 하이트의 100여년에 가까운 전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사로 치면 두 기업 모두 1933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정말로 이제는 90년을 넘어 100년을 넘어가는 기나긴 전쟁을 치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일본맥주가 설립한 조선맥주주식회사가 1933년 8월, 기린맥주가 설립한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가 1933년 12월에 세워졌습니다. 두 회사에서 시작된 맥주 전쟁은 브랜드를 바꾸거나 때로는 기업의 주인을 바꿔가며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맥주는 서구 문물과 함께 조선으로 유입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개항지를 중심으로 삿포로 에비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브랜드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 맥주회사들이 조선에 출장소를 내며 소비량이 늘어 1920년대에는 수입주류 가운데 1위를 차지합니다.

우리 땅에 최초로 맥주가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33년의 일입니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며 청일전쟁을 일으킵니다. 국제사회의 철수 권고까지 거부한 일제는 중국 본토 침략전쟁을 계속하며 태평양전쟁까지 전선을 확대합니다. 대륙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군수품의 보급선이 굉장히 길어진 일본은 조선에 여러가지 병참기지를 설립하기로 계획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1933년 서울 영등포, 당산 일대에 많은 공장을 세웠는데 여기에 맥주 공장도 같이 세워졌습니다. 이때 세워진 조선맥주주식회사(하이트진로), 기린맥주주식회사(오비맥주)가 지금 우리가 먹는 맥주들의 조상입니다.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일본인들이 모두 철수하고 이들의 재산은 적산(적이 남기고 간 재산)으로 분류됩니다. 일제가 떠난 후 쇼와기린맥주는 경성방직의 박승직(두산 창업자)과 아들인 박두병이 인수하여 오비맥주라는 브랜드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전쟁중이던 1952년 정식으로 경영권을 인수함으로써 민간기업 '동양맥주주식회사'가 정식 출범합니다.
오비 맥주도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을사오적으로 유명한 민영휘의 아들인 민대식과 손자 민덕기가 회사를 인수합니다. 이후 조선맥주라는 기업 명칭은 유지하면서 '크라운' 브랜드를 새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100여년에 가까운 두 회사의 맥주 전쟁이 1933년 시작됩니다.

맥주


두 맥주 회사는 대표적 친일파 기업인들이 인수해 시작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박두병의 부친이자 동양맥주의 주주인 박승직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기업가의 원조로 꼽는 인물입니다. 일본과 조선의 내선일체를 목적으로한 조선산업대회나 조선인 강제징용, 위안부 모집에 앞장섰던 그는 1941년 일본 이름 미키 쇼쇼쿠를 따서 박승직 상점을 아예 미키상사로 바꿉니다. 민영휘와 민대식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는 대표적 친일인물들입니다. 일제 강점기 최고의 재벌기업가인 민영휘는 한일합병 과정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일제에 협조한 대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다시 맥주로 돌아가볼까요. 조선맥주주식회사의 크라운 맥주는 1950년대까지 맥주 시장을 주도합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동양맥주(오비)는 유명인을 모델로 하는 대대적인 프로모션과 마케팅을 통해 시장을 역전시킵니다. 오비맥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한 조선맥주는 1969년 부산지역을 대표하던 소주제조기업 대선주조 일가로 넘어갑니다. 새롭게 주인을 맞이한 크라운 맥주는 다시 부상하여 점유율을 40퍼센트도 회복하며 오비와 경쟁을 지속해 나갑니다.

사실 1970년대까지만해도 맥주는 부유층이 즐기는 고급술이었습니다. 맥주 광고에는 승마, 조정, 테니스 등이 등장했고 일반 서민들에게 맥주는 명절에 선물로 건네는 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수출산업의 호조, 중동건설 붐 등 경제호황으로 인해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맥주 소비량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오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맥주 대중화에 앞장섭니다. 1980년대 오비는 크라운과의 격차를 더 벌리며 맥주는 오비라는 공식을 만듭니다. 당시 대중화된 컬러TV도 맥주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합니다. 선명한 황금색 맥주에 크리미한 흰색 거품을 목젖을 벌컥벌컥 울리며 들이키는 모습은 여러 국민들에게 맥주에 대한 욕구를 끌어올리는데 충분한 효과를 발휘합니다.

1980년대 등장한 OB호프는 맥주 소비층을 더욱 확대하고 호프집이라는 새로운 맥주 문화를 만듭니다. 생맥주의 소비 증대를 고민하던 오비맥주가 직접 맥주판매업소를 고안해 오픈한 것인데 당시 트렌드를 이끄는 일명 핫플레이스로 자리매김하여 젊은 층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습니다.

크라운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오비맥주는 1990년대 초반에는 시장점유율을 80퍼센트 가까이 끌어올리면서 맥주 시장을 완전히 점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오랜 세월 1위를 지켜온 오비맥주가 무너져내리는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1991년 경북 구미공단의 두산전자에서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발생합니다. 독극물인 페놀 원액 30만톤이 낙동강으로 유출된 당시 엄청난 재앙이었습니다. 엄청난 충격 속에서 두산그룹에 대한 반발과 불매운동이 확대되었고 오비맥주도 큰 타격을 입습니다.

이때를 크라운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고 안심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이 시기에 '지하 1500미터 천연암반수로 만든 맥주, 하이트'를 탄생시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고려한 적절한 마케팅이였으며 깨끗한 물 컨셉을 위해 생산공장까지 일부러 강원도로 이전합니다. 수십년 이어오던 브랜드 크라운을 버리고 새로운 브랜드를 채택한 대담한 결정이였고 이 결정은 유효했습니다. 1993년 30퍼센트에 그치던 시장점유율이 1996년 43퍼센트로 1위로 올라섰고 2000년에는 53퍼센트, 2009년에는 59퍼센트를 돌파하며 하이트 역사를 써내려갑니다. 1998년에는 창립때부터 써오던 조선맥주라는 사명마저 하이트맥주주식회사로 변경합니다.

하이트의 엄청난 턴오버에 당황한 오비는 필사적으로 대응합니다. 사운드, 아이스, 넥스 등 신규 브랜를 런칭하지만 모두 실패합니다. 결국 오비의 체면을 세운것은 오비라는 브랜드입니다. 오비라거를 브랜드로 채택하고 '맛있음' 을 1순위로 내세웁니다. 오비라거는 성공적으로 런칭되어 다시 오비맥주의 체면을 살려줍니다. 결국 동양맥주주식회사도 오비맥주주식회사로 사명을 변경합니다. 오비의 시련은 이게 끝이 아닙니다. 사업다각화 측면에서 맥주시장을 노리던 진로가 맥주시장에 뛰어듭니다, '카스'를 출시한 것입니다. 모기업인 진로는 소주시장에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며 시장확대를 노리던 중 맥주시장마저 잡아먹으려 진출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을까요? 문어발식 확장을 하던 진로에게 IMF라는 하늘의 재앙이 내려옵니다.

진로는 1997년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진로쿠어스(카스)는 오비맥주에 인수됩니다. 오비맥주는 젊은 맥주 이미지를 잘 유지해오던 카스를 하이트의 대항마로 적극 육성합니다. 1990년대 후반에 들어가며 가벼운 술을 즐기려는 사회적 테른드에 따라 소주의 도수가 낮아지기 시작했고, 이른바 소맥이 유행하면서 카스처럼이라는 새로운 술 풍속도를 만들어냅니다. 결국 카스는 2012년 맥주 시장 1위로 다시 올라서게 됩니다. 영원할것 같던 하이트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어갑니다, 카스를 앞세운 오비는 시장 점유율 50~60퍼세트를 유지하며 전성기를 회복합니다.

이렇게 유지되어돈 시장에 롯데가 '클라우드'를 들고 진입하면서 천하삼분지계를 꾀합니다. 그리고 몇년 뒤 하이트진로에서 출시한 '테라'가 좋은 반응을 보이면서 또 다른 판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편의점과 마트에서는 여러 수입맥주 제품들이 들어오고, 전국 각지의 양조장에서 만들어내는 강서에일, 서울에일 등 수제 제품들이 유통채널을 통해 우리들에게 진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맥주 시장은 앞으로 더욱 다양하고 독특한 풍미를 내세우는 제품들의 각축전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맥주 시장을 100여년 지켜온 오비와 하이트에 100년 전쟁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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