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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술

대한민국 소주 역사 (참이슬/진로)

by 지식노트 2022.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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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서 먹고, 속상해서 먹고, 기뻐서 먹고, 축하하기 위해 먹고, 위로하기 위해 먹고, 심심해서 먹고, 술은 없어서 못먹지 이유가 없어서 못 마시는 일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음주공화국, 특히 소주공화국입니다. 우리나라가 전통적으로 먹던 술은 막걸리이지만 이제는 명실상부 소주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술로 자리잡은지 오래되었습니다. 소주의 대명사 '진로'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탄생해 100년 가까이 살아남아 사랑받는 그야말로 전국민 브랜드입니다. 

1924년 진로의 창업자인 장학엽이 자신의 고향인 평안남도 용강에서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합니다. 그가 소주 사업을 시작한 평안남도 용강군 지운면의 '진지동'은 '참못'이라고 불리며 예전부터 물이 좋기로 유명한 동네였습니다. 진지에서 진을 따오고 소주를 증류할때 술방울이 이슬처럼 맺히는데서 착안하여 로를 붙여 이때부터 '진로'라는 브랜드를 사용했습니다.

진로의 장학엽 창업자는 전통적 증류방식으로 소주를 생산하되 기존의 재래식 누룩이 아닌 일본의 흑국을 이용했는데 이 흑국소주는 상대적으로 더 많은 양의 술을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으며, 쌉쌀하면서도 짜릿한 특유의 맛이 있어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모든 생산시설을 잃은 장학엽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습니다.

피난지인 부산에서 장학엽은 창업자 정신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부산에서 유명한 소주회사 동화양조와 동업을 시작하여 '금련'과 '낙동강'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이북식 소주의 열풍을 불러일으킵니다. 전쟁이 끝난 뒤 서울로 올라와 1954년 신길동에 '서광주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진로 브랜드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진로의 두번째 도전입니다.

이때 진로의 트레이드마크인 두꺼비가 탄생합니다. 두꺼비는 은혜를 갚을줄 아는 슬기롭고 영험한 생물로 여겨졌기에 두꺼비를 붙인 진로소주가 최초로 나오게 됩니다. 서광주조가 서울에 자리를 잡을 당시 서울에는 최대 소주 생산업체였던 '명성'을 비롯해 백마, 백양, 청로 등 많은 소주업체들이 군웅할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진로이즈백

 

진로 영업직원들은 제발 맛이라도 봐달라고 자전거와 리어카에 소주를 싣고 골목 골목마다 방문하며 진로 소주를 홍보했습니다. 북한 지역의 전통을 담은 강렬한 맛의 진로 소주가 유명해지기 시작했고, 대표적인 술인 막걸리에 비해 운반과 보관이 쉽고 유통기한이 긴 소주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진로는 출시 10년만에 1964년에 10퍼센트대 시장 점유율을 차지합니다.

이러한 눈부신 성장도 잠시, 1964년 양곡관리법이 개정되며 쌀을 이용한 소주와 맥주 제조가 전면적으로 금지됩니다. 1960년대까지만해도 우리나라는 여전히 보릿고개를 겪으며 만성 식량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술 빚는데 필요한 쌀의 수요를 줄여 쌀 가격 안정화를 꾀하고자 했던 정책이었습니다. 또한 서민과 노동자들이 싼 값에 마실 수 있도록 희석식소주를 적극 장려하는 화전양면전술이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대중주 시장은 빠르게 희석식 소주 중심으로 재편됩니다. 양곡관리법 이후 진로는 빠르게 희석식 소주 생산시설을 갖추고 당시 희석식소주 1인자인 '삼학'과 대결합니다. 두꺼비와 학이 소주시장을 놓고 벌인 전쟁은 '소주 전쟁'이라고 불리울만큼 치열하고 격렬했습니다. 현재의 참이슬과 처음처럼같이 당시 손님들도 순하고 단 삼학파와 독하고 쓴 진로파로 나뉘었습니다. 이 경쟁에서 삼학이 세금포탈로 무너지며 진로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대표 소주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 1976년 '자도주 의무구입제'가 시행됩니다. 정부 정책에 의해 각 시도별로 한 개의 업체만 소주를 생산하고 그 생산량의 50퍼센트를 해당 지역에서 의무적으로 소비하도록 한 박정희 정부의 정책입니다. 이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소주를 생산하던 소주제조업체들이 수도권의 진로, 부산의 대선, 강원 경월, 경북 금복주, 경남 무학, 전남 보해, 충남 선양 등 십여개 업체로 정리됩니다. 지금도 이름이 익숙한 업체들입니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정부가 정해준 시도별 독점으로 인해 편하게 영업할 수 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전국으로 시장을 확대하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존재했습니다. 20여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이 구조는 1996년 시장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폐지되면서 다시 한 번 전국시대가 열립니다. 하지만 결국 서울을 중심으로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있던 진로가 손쉽게 천하를 통일하며 전국 40퍼센트 대의 점유율을 유지하며 1990년대가 저무는가 했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경월이 두산에 인수되며 '그린'이라는 소주를 대관련 청정수 이미지를 내세우며 진로에 도전해옵니다. 그린은 최초로 초록색 소주병을 내세우며 친환경 이미지와 깨끗한 이미지를 동시에 가져옵니다. 그린은 출시 7개월만에 1억병을 돌파하고 수도권 시장 점유율 30퍼센트를 돌파합니다. 

진로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1998년 진로를 재해석한 '참이슬'을 출시하여 시장의 판세를 다시 가져옵니다. 진로라는 브랜드를 재해석하여 참이슬을 출시한 진로는 대성공을 거둡니다. 국내 시장을 절반 이상 장악하고 전신인 진로의 자리마저 빼앗으며 참이슬 천하를 엽니다.

대기업 두산도 역시 만만치 않은 저력을 가졌습니다. 대관령 청정수를 내세운 그린의 후신답게 알칼리 환원수로 만든 부드러운 소주를 강조하기 위해 20도 도수를 내린 '처음처럼'을 2006년 발매합니다. 당시 800원이던 출고 가격을 730원으로 낮추면서 가게 사장들의 호응도 얻어 순식간에 참이슬을 위협합니다. 신영복 교수의 서화 에세이집과 서체를 그대로 가져와 소주 브랜드답지 않은 친근함과 새로움을 더했습니다. 두산이 신영복 교수에게 글씨체 저작권 1억원을 지급하려 했으나 신 교수가 만류하는 바람에 성공회대학교에 장학금으로 1억을 기증한 미담이 퍼지면서 더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때부터 약 2019년까지가 우리가 아는 소주 2파전 시대입니다. 가게에 술을 마시러 가면 "참이슬이요? 아니면 처음처럼?"은 모든 이모들의 첫 질문이 되었습니다. 참이슬과 처음처럼은 연한 소주 경쟁을 시작하여 2012년 19도, 2014년 18도, 2019년 진로이즈백은 16.9도로 독주의 기준인 17도마저 깨트립니다.

진로이즈백은 저도수 경쟁의 끝판왕이자 뉴트로 열풍의 마스터입니다. 진로의 마스코트 두꺼비를 귀엽게 재해석하고 수십년 전 쓰이던 흰 병의 소주를 출시하여 대박을 터트립니다. 현재 참이슬과 진로이즈백이라는 두개의 진로 제품들이 처음처럼을 몰아내고 있으니 당분간은 진로의 아성이 쉽게 무너지지 않을듯 합니다.

진로는 200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맥주인 크라운맥주의 전신, 하이트맥주로 주인이 바뀝니다. 우리나라 최초 소주와 최초 맥주가 한 지붕 아래에서 시장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망해도 브랜드는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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