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틀면, 신문을 보면 온통 청와대 이전 얘기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청와대는 과연 언제부터 국가지도자가 집무를 보던 자리일까요? 청와대의 상징성은 어느 정도 일까요?
청와대 터는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완공된 남경 이궁(離宮·별궁)이 있던 곳입니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경북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의 후원(後園)에 해당하는 자리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어영(御營)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 또는 임금의 친경(親耕, 임금이 직접 경작)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1927년에 모두 헐리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官邸)가 건립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뒤편엔 총독 관사를 둬 왕실의 기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했습니다. 광복 후에도 청와대 자리는 우리의 것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미군정 시기에는 하지 중장(미군정 최고책임자)의 관저로 사용하다가 1948년 정부 수립 후에야 우리 곁으로 돌아옵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청와대를 관저로 사용하면서 경무대(景武臺)라고 칭했습니다. 경무대는 경복궁(景福宮)의 ‘경’ 자와 궁 북문인 신무문(神武門)의 ‘무’ 자를 따온 것인데 독재의 대명사처럼 여겨졌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자 새로 집권한 윤보선 대통령은 본관 건물이 청기와로 이어져 있는 점에서 착안해 ‘청와대’로 개칭했습니다.
이후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인 본관, 외빈 접대 시절인 영빈관, 비서진들이 근무할 수 있는 부속시설 등이 들어서면서 단순히 대통령 관저 차원을 넘어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 글을 보시는 여러분만 해도 청와대라는 이름 세 글자가 주는 권위가 얼마나 큰지 다들 느끼실 겁니다. 그간 청와대를 놓고 논란이 많았습니다. 국민들과 떨어진 ‘구중궁궐’이라거나 대통령 주변의 핵심 비선들의 ‘인의 장막’에 갇혀서 불통의 상징처럼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역대 대통령 당선인들은 늘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청와대 이전을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지만 끝끝내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임기가 끝나가는 문재인 대통령도 국민과의 소통을 그렇게 강조했지만, 정작 국민과 소통한 적은 정말 손에 꼽을 만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청와대 자리가 풍수지리 측면에서 흉지(凶地)라는 논란도 끊이질 않습니다. 풍수지리 전문가인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청와대 터는 죽은 영혼들의 영주처거나 신의 거처”라며 ‘흉지론’을 주장한 바 있으며, 현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캠프에 속해있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등도 청와대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을 개진한 바 있습니다. 청와대가 흉지이든, 권력의 절대부패성이든 초대 이승만 대통령 이후 많은 대통령들이 임기 중, 혹은 퇴임 후에 비운을 겪은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감옥에 가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유배되는 등 대통령들의 퇴임 후에는 대부분 비참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청와대 이전 여부의 적합성을 떠나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에 정당간의 정치적 발목잡기가 다시 여의도를 뒤덮고 있습니다. 청와대 이전이 과연 정말 옳은 방향인가에 대한 의문은 들지만, 새로운 대통령의 취임 일성을 마냥 반대하는 야당도 보기 좋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