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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7

조선시대 품계 설명, 대감(大監)과 영감(令監)의 차이 조선시대 직급은 문.무반(文武班) 각각 가장 높은 정 1품부터 가장 낮은 종 9품까지 총 18단계의 직책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지금의 공무원과는 다른 것이 당시에는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농민이었고, 공식 직급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아주 높은 신분으로의 상승을 의미했습니다. 정1품부터 정3품 상계인 문관의 통정대부 이상을 당상관, 정3품 하계인 통훈대부 이하 종6품까지를 당하관(참상관), 정7품부터 종9품까지 참하관이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시대 품계는 다양한 위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1) 호칭의 차이 :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많이 듣는 삼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은 가장 높은 정1품, 병조판서 등 00판서는 정2품이었습니다. 직급에 따라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는데, 정2품 판서 이상은 '대감',.. 2023. 6. 15.
조선시대의 유배형(流配刑), 과정과 종류는 무엇이 있을까? 조선시대의 형벌, 유배형에 대해서 여러 역사 드라마와 책을 통해서 접해보셨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도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지은 자를 먼 변방이나 오지로 보내는 형벌이 존재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옥사는 있었지만, 요즘으로 따지자면 수사와 재판 과정 중인 미결수를 가두어 놓는 임시 구치소만 존재했을뿐, 장기간에 걸쳐 죄수를 수용하는 교도소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 조선시대의 형벌, 오형제도 조선시대의 형벌은 대명률에 근거하여 집행되었습니다. 대명률(大明律)은 조선이 황제의 나라로 섬겼던 명나라의 형법을 말하는 것이고, 대명률에 기반하여 조선시대에도 다섯 가지 유형의 형벌인 오형제가 실시되었습니다. 오형제는 엉덩이를 가벼운 매로 때리는 태형, 무겁고 묵직한 곤장으로 엉덩이를 때리는 장형,.. 2022. 12. 1.
진짜 소통을 실천했던 군주, 세종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이들은 세상에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왜 정말로 위대한 왕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종은 커뮤니케이션의 대가였고, 실천가였습니다. 세종은 백성, 신하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려고 했고 실제로 수 많은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이를 실천했습니다. 첫째, 세종은 백성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는 낮은 직급의 관리인 수령을 자주 만났습니다. 재위 기간 세종이 수령을 친견(독대)한 횟수는 무려 392회나 됐다(월 1.03회). 조선 왕조에서 왕이 지방 수령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은 세종 때부터였고 그 이후에도 친견을 이렇게 주기적으로 많이 실시한 군주는 없었습니다. 세종은 수령의 임무는 본인이 직접 백성의 일을 살필 수 없으므로 수령들이 존재하는 것이니 부디 백.. 2022. 4. 5.
암행어사의 필수품 마패? 유척(鍮尺)도 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들에게는 마패보다 중요한 필수품이 있었죠, 바로 유척입니다. 암행어사 제도는 조선시대에 왕이 믿을 만한 당하관(堂下官)을 뽑아 지방으로 비밀리에 파견하여 지방 관리와 토호들의 잘못을 바로잡거나 백성들의 고통을 탐문케 하는 제도입니다. 우리는 흔히 춘향전의 이몽룡으로 암행어사를 기억하고 있지요. 만화나 영화의 암행어사 출도 장면에서, 암행어사가 마패를 보이면 천지를 진동시키며 암행어사 휘하 군인들이 등장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잘 모르는 암행어사의 또 하나의 필수품이 있습니다. 바로 '유척(鍮尺)'입니다 유척은 그냥 자입니다. 근데 왜 암행어사는 유척을 필수로 지니고 다녔을까요? 당시 조선시대에는 현재의 cm, kg 등 정확한 단위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한 되, 한 홉 등의 계량 척도.. 2021. 11. 21.
왕십리(往十里)와 답십리(踏十里)의 유래 서울의 역사 중에서 무학대사와 왕십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새 도읍지가 들어설 명당 자리를 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도읍지가 될만한 곳을 찾다가 마땅한 곳이 없어, 무학대사는 한양 근처까지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 날 소를 타고 지나가던 백발노인이 " 에이, 이놈의 소는 미련한게 꼭 무학을 닮았구나."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깜짝놀라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노인은 또 다시 소에게 "어리석게 좋은 곳은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니는구나."하며 중얼거렸습니다. 무학대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노인에게 다가가"소승의 이름이 무학입니다만 혹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신지요?"노인은 소만 쳐다볼 뿐 아무말이 없었습니다. 무학대사는 범상치 않은 노인이.. 2021. 11. 19.
조선시대 최고의 의결기관 의정부, 왜 지금은 지명으로 바뀌었을까? 지금은 우리에겐 지명으로 더 익숙한 이름이지만 의정부는 사실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부의 역할을 하는 기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최고의 의결기관은 왜 서울 동북부의 지명으로 바뀌어 불리는 것일까요? '의정부'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태종이 임금이던 태상왕 시절에 의정부(현재 의정부시)에 머무르며 6조 판서와 정사를 의논하였다고 하여 그 명칭이 이 곳의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조선 초 1400년 2차 왕자의난 이후 이방원은 제3대 태종으로 전위하나 태조(이성계)는 태종에 대한 증원의 감정을 참지 못해 고향인 함흥으로 가버립니다. 이에 태종은 여러차례 차사를 보냈지만 태조는 물론, 차사 역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무학대사가 함흥으로 가.. 2021. 11. 16.
조선의 연쇄살인마, 사도세자 사도세자 이선(1735~1762)은 ‘당쟁의 희생양’으로 주로 인식돼 왔습니다. 엄한 아버지 영조의 꾸지름에 의해 뒤주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알려져 있죠 과연 사도세자는 억울한 죽음의 희생양일까요? 그는 사실 조선의 가장 잔혹한 연쇄살인마였습니다. 영조는 세자를 폐하면서 “세자가 죽인 중관, 나인, 노속이 100여명에 이른다”라고 발표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요? 세자는 체격이 크고, 뚱뚱했습니다 영조 20년 (1744년) 4월 14일 말합니다 “세자가 식사량이 너무 많고 식탐을 억제하지 못해 뚱뚱함이 심해지고 배가 나와 열 살 아이 같지 않다” “(세자가)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뛰어 나지만 뚱뚱해서 얼굴 생김새가 별로라 답답하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도 말년에 쓴 회고록 ‘.. 2021.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