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276 청와대 터의 역사와 논란 TV를 틀면, 신문을 보면 온통 청와대 이전 얘기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궁금해졌습니다, 청와대는 과연 언제부터 국가지도자가 집무를 보던 자리일까요? 청와대의 상징성은 어느 정도 일까요? 청와대 터는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완공된 남경 이궁(離宮·별궁)이 있던 곳입니다. 조선 건국 후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경북궁의 북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의 후원(後園)에 해당하는 자리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어영(御營)의 연무장(鍊武場)이나 과거장(科擧場), 또는 임금의 친경(親耕, 임금이 직접 경작)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건물들은 일제강점기 1927년에 모두 헐리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 관저(官邸)가 건립되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가로막아 그 앞에 청사를 짓고 뒤편엔 총독 관.. 2022. 3. 21. 롱기누스의 창 롱기누스의 창(Spear of Longinus)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성창이라고 불리는 롱기누스의 창은 [Holy Lance,聖槍)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한 병사가 그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찔렀는데 예수의 피가 묻어서 성스러운 창이 되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을 때 그가 살았나 죽었나 확인 차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로마 병사의 이름인 롱기누스에서 유래했습니다. 롱기누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소개된 기독교적 기원은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입니다. 여기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찔렀고, 이때 예수의 배에서 물과 피가 흘라나왔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예수의 죽음을 거론한 기독교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에만 기.. 2022. 3. 20. 죽음의 상징이 된 중국 북망산(北邙山) "북망산에 오르다, 북망산에 올랐다". 우리 문화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말할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북망산(北邙山)의 사전적 풀이는 '무덤이 많은 곳 또는 사람이 죽어서 묻히는 곳을 이르는 말'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북망산이 중국낙양 인근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이라는 사실, 아셨나요? 북망산은 실제 지명으로,중국 7대 고도의 하나인 뤄양(낙양洛陽: 낙양은 예전에 '뤄양'을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것) 서쪽에 있는 산입니다. 낙양은 중국 역사에서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많은 왕과 황제들이 도읍으로 삼은 수도였습니다.자연스레 옛날의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낙양 근처의 산에 묻혔습니다. 북망산(北邙山)의 본래 이름은 망산(邙山)입니다. 망산이 낙양의 북쪽에 위치하기에 북망산이라 불리웁니다. 북망산.. 2022. 3. 20. 춘부장(椿府丈)과 훤당(萱堂)의 유래 춘부장(椿府丈)은 상대방의 아버지를 높여 부를 때 흔히 쓰던 말입니다. 춘부장(春府丈)으로도 씁니다. 춘(椿)은 대춘(大椿)이라는 상상 속의 나무입니다. 장자(莊子)는 이 나무가 8천 년을 봄으로 삼고, 다시 8천 년을 가을로 삼는다고 하였습니다. ‘府’는 ‘마을 부’라고 읽습니다, 椿府는 ‘장수 마을’이라는 뜻이고, ‘丈’은 ‘어른 장’이니 椿府丈은 ‘장수마을의 어르신’을 뜻합니다. 한철 8000년을 4계절로 곱한 햇수인 3만2000년을 사는 椿府의 어르신처럼 오래 사시라는 의미를 담아, 상대방의 아버지를 춘부장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모친(母親)이나 자친(慈親)이라 부르고, 남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높임의 뜻으로 당(堂)자를 붙여 자당(慈堂)이나 훤당(萱堂)이라고 불렀습니다. 자(慈)는 '사랑.. 2022. 3. 20. 우리시대의 역설, 제프 딕슨 우리시대의 역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작아졌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좁아졌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가난해지고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작아졌다 편리 해졌지만 시간은 없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 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나빠졌다 분별없이 소비하고 적게 웃고 빨리 운전하고 성급히 화를 낸다 많이 마시고, 많이 피우며 늦게까지 깨어있고 너무 지쳐서 일어나며 적게 책을 읽고 텔레비젼을 너무 많이 본다 그리고 드물게 기도한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줄어들었다 말은 많이 하고 사랑은 적게하며 거짓말은 자주한다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렸고 인생을 사는 .. 2022. 3. 19. 사이다는 어떻게 한국의 국민음료가 되었을까? 사이다(Cider)는 원래 유럽에서 마시던 사과를 발효시켜 만든 가벼운 술을 뜻합니다. 오늘날 탄산이 톡톡 터지는 사이다와는 다른 음료지요. 라틴어 시케라(sicera)에서 유래된 이 사과술은 프랑스로 건너가면서 시드로(cidre), 다시 영국으로 건너가 사이다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영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이 사이다에 과일향을 첨가해 '샴페인 사이다'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면서 술이 아닌 탄산음료로 바뀌게 됩니다. 사이다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들어오게 된 곳은 인천 부두입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출발지이자 개화 문물을 대거 받아들인 유입지이기도 합니다. 1905년 인천 중구 신흥동에 '인천탄산제조소'라는 회사가 세워져 미국식 5마력 발전기를 이용해 사이다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1910년 신흥동에는.. 2022. 3. 17. 중국의 밤을 지배한 여자 등려군(鄧麗君), 월량대표아적심과 첨밀밀 중국의 낮은 덩샤오핑(등소평·鄧小平)이 지배하고, 밤에는 덩리쥔(등려군·鄧麗君)이 지배한다. 1970년대 중국에서 개방개혁이 시작되며 대만 출신 가수 등려군(1953~1995)은 말그대로 대륙의 밤을 지배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녀의 대표적인 노래 월량대표아적심과 첨밀밀은 당시 ‘정신오염’을 이유로 중국 정부에 의해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지만 중국인들은 정부의 눈을 피해 등려군을 몰래 들었습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젊은 시절, 등려군의 노래를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고 고백할 만큼 당시 중국의 밤은 등려군이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등려군은 중국의 국공 내전 당시 혼란을 피해 대만으로 이주한 부모 밑에서 1953년 태어났습니다. 7살에 처음 무대 위에 오른 그는 14세.. 2022. 3. 16. 대한민국 맥주 역사 (두산OB/하이트) 우리나라 맥주 시장은 오비와 하이트의 100여년에 가까운 전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사로 치면 두 기업 모두 1933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정말로 이제는 90년을 넘어 100년을 넘어가는 기나긴 전쟁을 치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일본맥주가 설립한 조선맥주주식회사가 1933년 8월, 기린맥주가 설립한 소화기린맥주주식회사가 1933년 12월에 세워졌습니다. 두 회사에서 시작된 맥주 전쟁은 브랜드를 바꾸거나 때로는 기업의 주인을 바꿔가며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맥주는 서구 문물과 함께 조선으로 유입됩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늘어나면서 개항지를 중심으로 삿포로 에비스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브랜드들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 2022. 3. 15. 이전 1 ··· 16 17 18 19 20 21 22 ··· 35 다음